감상글(시)

1984년, 빵가게 / 여국현

톰소여와허크 2022. 1. 1. 12:15

1984, 빵가게 / 여국현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가 문을 닫았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물에 젖은 깻잎 모양 흐느적거리며 귀가할 때

은행 옆 은행나무 맞은편 옛체로 쓰인 하얀 간판 아래

밝은 조명이 환한 진열장 뒤에서 가게를 지키던 중년의 부부가

빵가게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금전출납기 통을 열었다 닫거나

가게 벽면에 달린 태양 장식 시계를 보거나

진열장 속 팔리지 않은 가지런한 빵들을 바라보고 있던.

부산어묵 아주머니는 오래 버텼지했다

슈퍼마켓의 사내도 오래 버텼지했다

대형 체인 바케트가 대로변을 점령한 뒤로

몇 개의 작은 빵집이 들어섰다 사라지고 하던 곳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주인 남자가 빵 봉지를 내밀며 멋쩍게 말했다

오늘 두 번째 손님이세요

 

제철소 노동자로 세상에서 내 길을 걷기 시작했던 그해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주인도

어딘가 제과점에서 그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흔들리며 필사적으로 이제까지 왔을 것이다

자정이 다 된 어두운 골목을 휘적휘적 걷는 나처럼

 

오늘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 은행나무 앞 골목을 지나며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빈자리를 본다

 

어딘가에서 환하게 불 밝히고 있기를

 

비틀거려도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찾아가

1984년부터 내가 써온 시 한 줄 읽어주면서

1984년부터 그가 직접 만든 빵을 먹을 수 있기를

 

-『새벽에 깨어, 푸른사상사, 2019.

 

 

감상 : 큰 자본을 가진 프랜차이즈 영업이 주변 상권을 흡수하면서 일반 소규모 가게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빵집 프랜차이즈 순위에 든 가게라 하더라도 본사와 가맹점 혹은 가맹점 내의 불평등한 계약관계나 고용문제 등으로 인해 정작 열심히 일한 사람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자본의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서 몸을 불리는지 알 만한데 작은 빵집으로 대변되는 영세업자들은 그 흐름의 반대편에 서서 최소한의 생계를 걱정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어느 날, 오후 느지막이 도착한 빵가게 손님에게,

오늘 두 번째 손님이세요라고 말을 내야 하는 주인은 속내가 평화로울 리 없다. 요식업 한 해 폐업률이 20프로를 웃돈다는 통계치대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생활비, 임대료, 은행 빚, 재료값을 셈해 보고 가게 문을 여는 게 맞는지, 더 손해 보기 전에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지, 가게 문을 닫고 새로운 가게 문을 열 여력은 있는지 따져보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 행복추구권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가고 있다.

월간 우리시에서 영시 해설을 맡아 인문학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는 시인의 이력을 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포항 포스코에서 일한 적이 있다.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는 그때 만난 가게란다. 제철소의 노동과 빵가게의 노동이 늦은 시간에 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된 추억이 이 시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1984년은 어떤 이에겐 야구선수 최동원의 불꽃 투구로 기억되겠지만 시인에겐 빵가게로 각인되어 있다. 이 땅의 가난한 노동이 소외되지 않고, “어딘가에서 환하게 불 밝히고 있기를빌어주는 마음이 따스하게 읽힌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