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로트렉,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
앙리 페뤼쇼(강경 역), 『로트렉,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 다빈치, 2009.
- 수잔 발라동이나 위트릴로에 비해 로트레크에 관한 책이 여러 권 출간된 거 같지만 그 중에도 앙리 페뤼쇼의 글은 그의 전기적 사실에 꽤 충실해 보인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동시대 다른 화가들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로트레크. 사냥을 좋아하던 그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이 열한 살 생일에 선물했다는 책 『현대와 고대의 매사냥』에 친필로 적은 글이 인상적이다.
“아들아, 창공과 대지에서의 삶만이 건강한 삶이란 것을 기억해라. 자유를 박탈당한 자는 자신마저 잃고 결국은 죽게 마련이다. 매사냥에 관한 이 작은 책은 네게 드넓은 대지의 삶을 가르쳐줄 것이다. 만약 네가 인생에서 쓴맛을 보게 된다 할지라도, 우선 말이 그 다음에는 개와 매가 너의 귀중한 친구가 되어 고통을 다소 잊게 해줄 것이다”라고.
이후 로트레크는 좌측 대퇴골 뼈와 우측의 다리뼈가 차례로 부러지면서 그는 육체적 성장을 멈추게 된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아버지와 취미를 같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아버지와 아들은 멀어진다. 아들이 그림을 선택한 것보다 술집과 사창가의 무용수나 직업여성을 주로 그렸던 것이 불화의 원인으로 짐작된다.
로트레크가 어느 정도 명망을 얻은 1895년, 알퐁스 백작은 보스크 성에서 아들의 유화 여덟 점을 불사르며, “이 쓰레기들은 더 이상 내 저택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느닷없이 고흐를 연상한다.(고흐에 관한 책을 썼는데 국내에서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듯하다) “반 고흐에게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구원이었을까? 그림이란 어떤 존재에 증식하는 괴물 같은 식물이어서, 그 존재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고 살아간다”고 했다. 아마도 저자는 아버지와 불화하면서, 로트레크 이상으로 불행했던 화가를 자연스레 떠올렸을 것이다.
로트레크는 반 고흐는 코르몽 아틀리에서 만나 몽마르트 거리에서 얼마간 우정을 나눈다. 1890년 정신병동에서 요양 중인 고흐는 그루프 데 뱅의 전시회에 그림 여섯 점을 보내오고, 앙리 드 그루는 고흐의 그림을 빼지 않으면 자신의 그림을 가져가겠다고 한다. 이때 로트레크는 고흐 편을 들어 둘은 결투 직전까지 간다. 고흐가 죽고 로트레크도 알콜중독으로 쓰러져 정신병동에 석 달 감금되기도 했다. 슬픔은 사는 동안 계속된다는 고흐의 말은 로트레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로트레크가 오래 머물렀던 몽마르트. 예술가들을 위한 술집으로 시작된 샤 누아르(검은 고양이), 무도회장을 겸한 물랭 드 라 갈레트, 샤 뉴아르가 옮겨간 자리에 생긴 미를리통, 댄스홀 엘리제, 로트레크 그림을 걸어두고 개장한 물랭루즈 등이 로트레크가 즐겨 다니며 술을 마시고 그림과 포스터를 그리던 곳이다. 이 곳 어디에서 수잔 발라동을 모델로 <숙취>(1887-1888)를 그린다.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압생트를 앞에 두고 삶의 고뇌와 슬픔이 묻어난 작품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로트레크에게 청혼하며 자살소동까지 벌였던 수잔 발라동이지만 로트레크는 그녀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희영은 『수잔 발라동, 그림 속 모델에서 그림 밖 화가로』에서 둘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여성이란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그림들엔 그 어떤 화가도 가지지 못한 그녀만의 힘이 담겨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알아보았고,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거침없이 개척해갈 수 있는 이름까지 선사했다. 마리 클로멘타인 발라동은 수잔 발라동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로트레크는 1899년에 말 그림을 다수 그린다. 서커스단의 말뿐만 아니라 <경마장의 기수>(1899)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원했던, 다리를 다치기 전에 자신이 꿈꿨던 장면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