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의 지붕 / 정재원
등나무의 지붕 / 정재원
등나무 그늘에 앉았다
듬성한 틈으로 얼레빗 빛이 스민다
여름을 보내고
물구나무서서 내려다보는 꼬투리
칭칭 몸 꼬아 타고 오르는 힘
저 꼬투리 속에는 수많은 하늘이 들어 있다
그해 봄, 마을 어귀 회관 앞
등나무는 보랏빛 꽃물로 그늘을 엮고 있었다
등나무 꽃 사이
종종 걸음으로 친정집 현관문 열었는데
부엌에서 나오는 구부정한 등허리
그늘 꽃을 다 피우고
뜯긴 등나무 껍질이었다
철렁, 가슴 한 줌 아버지의 발 앞에 쏟고
돌아갈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2층 난간 짚으며 뒤따라온
향내가 코끝을 찔러 두 눈 뜰 수가 없었다
버스를 그냥 보냈다
등나무 아래 등꽃은 뚝뚝 지는데
서쪽하늘은
어룽진 동그라미로 하루 꽉 채우고 있었다
-『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 문예바다, 2021.
감상 : 갈등(葛藤)의 주인공인 등나무와 칡나무는 덩굴식물로 다른 대상을 감아서 올라가는 성질머리가 있다. 꽃은 둘 다 화려하다. 진한 색감을 갖고 기세 있게 위로 피는 칡꽃이 사나워 보이는 면이 좀 있다면 등꽃은 연한 색감을 갖고 아래로 포도송이 같은 꽃을 피우면서 한결 부드러워 보이는 면은 있다.
시골 마을회관 앞엔 느티나무나 팽나무 같은 커다란 정자목이 으레 있지만 그 그늘엔 평상 정도만 내놓고, 대개는 약간 떨어진 곳에 쉼터를 만들어 기둥 쪽에 등나무를 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등나무의 성장이 빠른 데다 한두 그루로 넓은 빈 지붕을 이파리로 빼곡 덮는 신통한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늘은 그늘이되 바람이 통해서 시원하고 이파리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도 운치 있다. 이 은은한 빛 자국을 시인은 “얼레빗 빛”이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에 오월의 꽃과 향기까지 보너스로 내주니 등나무의 매력이 상당하다.
등나무 고목일수록 그늘의 위세와 꽃의 향기는 더할 테지만 그런 중에도 나무의 노쇠화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진행 정도는 다르겠지만 몸이 트고, 껍질이 벗겨지고, 줄기가 푸석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다니러 온 시인은 친정집에 들렀다가 부쩍 늙어버린 부모 모습에 마음 아파한다. 자식 건사하느라 고생한 노년 모습이 그늘 꽃을 피우느라 몸의 정기를 소진한 마을의 등나무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등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향기는 얼마나 좋은가. 그 향기의 뿌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등꽃은 져도 지지 않는 정(情)이 있어 슬프기도 하고 그윽하기도 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