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톰소여와허크 2022. 2. 17. 15:44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끊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오늘은 낮잠 속에서 새 세상 만난 듯

담배 피우는 나를 만났다

우주를 송두리째 한 모금에 빨아들여

맛나게 소용돌이치는 블랙홀

말머리성운이 갈기를 흩날리며 히히힝

아득한 성간(星間)을 내닫고 있었다

그 바람에 기침하셨는지

어제 뵌 열암곡 새갓골* 마애불님께서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으셨다

내가 입 안 가득 머금은 미련 땜에 어물어물

일어나실 인연이라고 여쭙기도 전에

온 우주를 코딱지만 하게 뭉쳐 코앞에 두고는

엎더진 채 코를 다시 고신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날 테니

니 놈은 어여 담배 끊을 궁리나 하라는 듯……

입때까지 천 년을 주무셔도 콧구멍조차 필요 없는 분이니

입술을 옴쭉 하실 리 만무하건만

나는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배터리가 거덜 날 때까지 궁리를 하였다

디카를 조작하여 돌아 눕혀드릴까?

그나저나 아까 담뱃불은 제대로 비벼 껐는지 몰라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목성에서 말타기, 도서출판 움, 2020.

 

 

감상 : 열암곡 새갓골 주차장에서 칠불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얼마쯤 가면 석불좌상이 나온다. 몸통만 있던 좌상을 머리 부분을 찾아서 붙여놓았다. 2007, 그 석불좌상을 보수하는 과정에 누워 있는 마애불을 발견했다. 지진으로 넘어진 걸로 보이며 부처의 코가 땅에서 5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넘어졌기에 큰 손상 없이 보존된 걸로 여겨서 기적의 5센티미터란 말도 나온다. 시인은 이곳을 답사하고 몽유도원에 온 듯한 감정을 가졌을 법하다.

새갓골 주차장에서 천룡사지를 향해가는 길도 있다. 산꼭대기 못 미쳐 숲에 가려진 넓은 평원이 나오고 그곳에 숨은그림찾기처럼 있는 삼층석탑을 볼 것 같으면 이곳 역시 몽유도원의 후보지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다.

시인은 어제 답사의 기억이 남았는지 꿈에 누워 있는 마애불을 만난다. 오래 전에 끊은 담배도 물고 있다. 담배 연기를 말머리성운에 비유한 것에 보듯이 꿈은 우주적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즐거움이 히히힝 소리로 근사하게 들리기까지 하지만 우주를 코딱지만 하게 말아 쥔 능력 앞에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꿈속이지만 마애불과 시인은 꽤 수작이 되는 분위기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누워 있는 마애불이 이제 일어나실 인연이라고 한 마디 내고 마애불이 반응을 하면 둘은 아주 특별한 관계에 놓이게 될 텐데, 그만 시인은 입에 머금은 담배 연기로 말을 내지 못하고, 마애불은 다시 코를 골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애불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있다. 누워 있는 마애불이 바로 설 때가 되었다는 애초의 속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시인이 사진 편집을 통해서라도 마애불을 바로 세울 궁리를 하는 대신 그냥 돌아눕게 한다는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서 그런지, 봐서는 안 될 일이 많다고 지레 걱정해서 그런지 그 속내가 궁금해진다. 한 자세로 오래 있는 자체로 몸이 경직되고 불편하긴 할 테니 시인의 배려는 충분히 따스운 걸로 해두자.

봄이 오면, 경주 남산은 곳곳이 몽유도원이 될 것이다. 시인의 걱정대로 담뱃불은 곤란하지만 몽유끽연까진 애써 말릴 순 없다. 산이 아니라 시에서 불똥을 튕기는 일이라면 암만 잦아도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