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시간의 여울

톰소여와허크 2022. 3. 12. 00:15

이우환(서인태 역), 시간의 여울, 디자인하우스, 1994.

 

 

- 이 책은 라일락 뜨락(이상화 시인 생가)에서 가져왔다. 뜨락에 들른 모 출판사 쌤이 두고 간 거란다. 뜨락 쌤은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 줄 모르고 한 번 더 읽었다고 한다. 모 출판사 쌤은 뱀에 대한 공포가 있는 줄 아는데, 이우환의 글을 보면 그런 기분도 야생을 떠난 도회적 삶에서 자신의 관념이 키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굳이 뱀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 뜨락 쌤은 야성을 잃지 않고 뱀을 동무 대하듯 해서 경이감이 든다. 라일락 뜨락에 가면 이우환 그림은 없지만 그 이상의 라일락 나무가 그림처럼 있다. 그림 좀 그린다는 주인의 작품과 주인이 선물받았다는 청개구리돌도 볼거리다. 이것으로 책을 내주고 보관해준 두 분께 인사를 대신하며 본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둔다.

 

이 책은 화가 이우환의 에세이다. 이어령은 이우환의 글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했다. 농부인 조부가 어떤 경우에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고향 흙을 일구고 산 반면 이우환은 고향인 함안에서 부산으로, 서울로, 일본으로, 파리로, 또 다른 세계로 떠돌다가 일본에서 직장을 얻어 오래 머물렀다. 미술과 미술 평론, 양방면으로 거장 대우를 받고 있다. 어떻게 보면 흙에서, 고향에서, 조국에서 멀어진 게 이우환의 노정 같기도 한데 이우환의 붓이 지나간 자리에 흙냄새가 있을 것도 같다. 덧붙여 얘기하기를, 흙은 온갖 모순을 중화시킨다고 했으니 이것으로 이어령이 이우환을 어떻게 읽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아크로폴리스와 돌멩이는 현상이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가 기질 또 그것이 갖고 있는 어리석음과 함정까지 중층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얻어온 돌조각 몇 개에 감개무량해하며 자랑으로 삼다가 그 돌이 다른 돌로 바뀐 것을 알았을 때 화가는 분노를 터뜨린다. 그 실망과 분노마저 허무하게 뭉개버리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으니 애초에 자랑하던 그 돌도 실은 바꿔치기 한 주차장의 돌조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화가는 버려야 할 것은 돌조각이라기보다 오히려 멋대로 다른 이미지를 덮어씌우려 한 나 자신의 태도라는 것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했다. 꿈에 홀리거나 믿음에 지나치게 빠지면 코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기 힘들다라고도 했다. 그런 화가로부터 모순을 지양하거나 극복해나가는 조화롭고 유연한 정신 자세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반성적이고 내적인 조화로움을 꾀하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된 내용은 아니다. 사실, 화가 이우환은 모순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커다란 통일 속에도 군데군데 파탄의 냄새는 떠돌 것이고, “매끈한 음조 속에 숨겨진 방해 요소의 작용이 포함되어야지만 그것이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고 했다. 겉치레만 반지르르한 조화로운 작품은 거짓 같고 얄팍하다고도 했다. 다만, 예술가의 재능을 두고, “신들린 완벽함이나 배제의 논리에 의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모호함과 모순을 껴안고, 어떻게 인간과 공명해가는 세계를 짜나갈 수 있는가의 역량과 관계 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고흐의 편지글이 고흐 그림을 읽는 근사한 창 역할을 해주듯이, 화가의 에세이로 화가의 작품을 읽는 시각을 조정하게끔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