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톰소여와허크
2022. 4. 2. 23:54

봄은 전보도 안 치고 / 김기림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 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 고는 시냇물들을 불러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스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플러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아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 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
-(1932년)
감상 – 김기림(1908~?) 시인은 여행을 좋아한다. 수필 ‘여행’에서, “진짜 여행가는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무작정이든 일부러든 떠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걸로 보인다. 김기림의 본보기가 되어준 사람은 보들레르다. 김기림은 여행 때 ‘악의꽃’을 먼저 챙기겠다고도 했다.
김기림 전집에 여행 관련 시편이 많다. 시인의 고향은 학성군인데 성진시로 따로 떼어 부르다가 현재 김책시로 명명한다. 고향을 지나는 함경선은 원산, 함흥, 성진, 경성, 회령을 잇는다. ‘함경선 오백킬로 여행 풍경’ 서문에서 시인은 “세계는 / 나의 학교 /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 나는 수없는 신기로운 일을 배우는 / 유쾌한 소학생이다”라고 했다. 일본 여행기를 시로 적은 ‘동방기행’ 서문에서도 “나를 얽매인 이 현재로부터 / 나는 언제고 탈주를 계획한다 / 마음이 추기는 진정하지 못하는 소리는 오직 / 가자 그리고 돌아오지 말자”라고 했다. 가서 돌아오지 말자는 시구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일 수는 있겠지만 어떤 정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낯선 곳에 대한 그리움과 그곳에서 새로 배우고 느끼면서 이전과 달라질 자신의 안목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봄은 전보도 안 치고」는 스물다섯 청년의 설레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발표 시기를 고려하건대 김기림이 서울의 신문기자 생활을 잠시 접고 고향에 와서 과수원 일을 도울 때 쓴 시로 보인다. 봄이 오는 것을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기지만 어머니는 오래전 시인이 겨우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 무덤에서 슬피 울던 누이가 어머니 뒤를 잇자, 김기림은 수필 ‘나의 항구’에서 “어머니와 누이는 어린 시절의 나의 기쁨의 전부를 그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버렸소”라며 회한 섞인 그리움을 얘기한 바 있다.
시인의 표현대로 봄은 도적처럼 갑작스레 왔지만 어쩐지 시인의 시선은 기차에 더 오래 머무르는 듯하다. 머리 위에 구름을 띄우고 방천에 늘어선 포플러를 담배연기 뿜는 실업자로 견준 데서 짐작되듯이 시인은 과수원 일로 자신을 잡아둘 마음이 없다. 남쪽으로, 북쪽으로, 또 어디로든 향해 가는 기차와 기선에 몸을 싣고 ‘떠나는 삶’의 주역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후 김기림은 재차 일본 유학을 떠나고, 서울로 돌아와 신문기자 생활을 이어간다. 함경선을 타고 고향인 함경도 성진을 지나 경성까지 내처 가서 그곳 경성중학교에 교사로 얼마간 재직한다. 그때의 제자가 김규동(1925-2011)이다. 김규동에게 문학의 씨를 심어준 김기림은 김규동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고 만다. 서울에 자리 잡고 대학에 출강하는 김기림을 만나러 삼팔선을 넘어온 김규동은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한다.
여행을 그렇게나 좋아한 김기림인 만큼 그 수단이 되는 기차도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다만, 1950년 이후로 그의 탑승 흔적을 더는 추적할 수 없다. 김규동이 60년간 한결같이 기다린 고향 가는 기찻길도 끝내 열리지 않았다. 봄은 도적처럼 왔다지만 기차를 멈춰 서게 한 이들이야말로 진짜 도적이란 생각이 든다. 과거와 현재, 이쪽과 저쪽을 잇지 않고, 상처와 상처를 깁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적 같은 짓 아니면 뭐겠는가 싶은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