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그림 에세이> 박고석
톰소여와허크
2022. 6. 1. 02:07
박고석, 『박고석』, 열화당, 1994.
산을 즐겨 그려 산의 화가라 불리는 박고석(1917-2002)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숭실중학교에 다닐 무렵,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싸움도 곧잘 하는 소년이었다. 그런 중에 화구를 메고 기자묘나 능라도 등에서 자연을 화폭에 담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심신의 피로를 맛보는 게 그림의 매력이었단다.
일본 유학 중 해방 되어 고향인 평양에 머물던 박고석은 첼리스트 전봉초와 함께 남으로 내려오고 이후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박고석』 책에서 고향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는 많지 않다. 집필을 위해 따로 쓴 것이 아니라 그간 쓰거나 발표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보니, 할 말은 많아도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피난지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기조전 창립 동인전’에 박고석은 이중섭(1916-1956, 평안도 평원), 한묵(1914-2016, 서울), 손응성(1916-1979, 강원도 평강), 이봉상(1916-1970, 서울)과 함께 참여한다. 전쟁과 굶주림 속에 이들은 돈이 생긴 사람이 술을 사고 밥을 산다. 그 중에서도 이중섭은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남을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다. 이중섭, 한묵과 함께 부산 시절과 서울 정릉 시대를 같이 보낸 박고석은 책에서 이중섭에 관한 이야기를 적잖게 한다.
이중섭은 생활의 방편이 될 수 있는 직장을 갖지 않았다. 친구들이 장정을 부탁해도, 그림을 사자고 해도 거절하는 비정상인이었다. 어쩌다 장정이나 그림이 돈이 되어 중섭에게 들어오면 큰일이 난 것처럼 굴며 친구들과 모두 소비해야 했다. 돈이 없으니 이중섭은 친구들의 신세를 져야 했지만 이중섭의 마음씀씀이에 친구들은 더 큰 신세를 졌다고 박고석은 회상한다. 한묵, 박고석, 이중섭은 삼총사처럼 어울렸다.
내색을 안 하기로 유명한 이중섭이 화를 낸 일화도 눈에 띈다. 대구 개인전에서 중섭 그림을 좋게 본 미국 공보원장이 황소 그림에 반해 스페인 투우처럼 박력이 있다고 찬사를 보내자 이중섭은 “부지런함과 힘이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내지 않는 선량하고 충직한 황소가 어떻게 싸움놀이의 상징인 스페인 투우와 비교되느냐면서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화를 내기도 했다”는 구체적 정황까지 들려준다. 고은의 『이중섭 평전』은 이중섭과 각별했던 구상 시인과 자신이 전해준 이야기가 바탕이 된 거라고도 했다. 고은은 박고석의 정릉 집을 자주 찾았다.
박고석이 부산 피난지 문인들의 풍경을 글로 스케치해둔 것 같은 아래 내용을 인용해둔다.
“피난 도중에도 직장이 있는 문인이 몇 분 있었다. 김광섭(대통령 비서실장) 씨, 이헌구(공보국 차장) 씨, 윤백남, 염상섭, 이무영 씨는 해군정훈장교였다. 군인 시인 김종문, 이영순, 이용상 씨 등은 일찍이 군문(軍門)에 들어가 있었다. 이분들은 여유가 있다기보다, 우선 그날그날의 생활이 되는 편이고 보니 으레 피난 예술인들을 알뜰하게 돌보아 주었다. 이분들이 다방에 나타날 무렵이면 무슨 구세주나 만난 것처럼 반겼고 줄줄이 열을 지어 따랐다. 시인 김종문 형은 당시 육군정훈감으로 있었고 나와는 죽마지우인 탓도 있어, 이 친구가 다방에만 나타나면 찻값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으레 술 한잔을 사야만 했다. 나뿐이 아니었다. 시인 김수영, 전봉래, 조헌광, 김종삼 씨, 소설가 박연희, 평론가 임긍재 씨 등이 늘 주위에 있었다.
태반의 피난민이 직장을 잃어버렸고, 더욱이 문인, 화가, 교수들은 아무 수입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슨 직장에 나가는 듯이 무슨 꼭 나가야만 하는 장소처럼 다방에 들끓었다. 광복동에 있는 에덴 다방에는 공초 오상순 씨를 비롯하여 서울의 모나리자 다방에 잘 나가던 문이들이 많았고, 밀다원에 나가면 김동리, 이원수 씨를 비롯한 서울의 문예살롱에서 많이 보던 얼굴들이 가득했다. 하루에 차 한 잔을 드는가 마는가 하면서 마치 자기집 드나들 듯 하였다. 다방이라기보다 문화인들의 집회소요 거래소 같은 느낌이었다.”
박고석 본인도 국제시장에서 시계 장사를 하고, 광안리 근처에서 카레라이스 집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다. 한묵, 이중섭, 정규 그리고 후배 몇몇이 허기를 때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같이 어울렸던 화가들에 대해선,
“화가 김병기 형은 역전에서 밀크와 토스트를 구워 팔았고, 영문학자 한노단 씨는 한 책 가게의 어엿한 주인님으로 행세했다. 그 밖에 많은 문화인들이 얼토당토않은 생업으로 탈바꿈했다. 화우 이중섭 형은 미군부대 배에 나가면서 기름치기를 했고, 이봉상, 손응성 양 화백은 미군의 초상화 그리기로써, 홍종명 형은 찐빵 장사, 정규 형은 깡통을 두들겨서 쓰레기통 등 묘한 물건을 만들어 아낙네들에게 팔았다.”
새로운 미술을 하자는 취지로 1957년 모던아트협회를 황염수, 유영국, 정규, 이규상, 천경자, 김경, 문신 등을 참여시켜 시작했으나 이후 실질적인 일꾼 노릇을 했던 한묵이 김환기 뒤를 좇아 파리로 넘어간 뒤 시들해졌다고 박고석은 아쉬워한다. 개성이 뚜렷한 작가들의 단합은 힘든 것이라는 말도 보탠다.
박고석 화가는 1955년부터 대략 삼십 년 정도 이어진 정릉 시대를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1983년엔 처남인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해준 명륜동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정릉에선 도심과 다른 자연의 운치와 서정, 맑은 공기가 있다. 산에 가서 나무하고 부부 동행하여 산책하는 기분을 내는 것도 좋고, 집에 와서 아내와 나누어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좋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통학하기 힘든 불편함이 있는 게 맘이 쓰이지만 아버지가 고생을 하는데 자식놈이 좀 고생을 하면 어떤가 하는 배짱으로 박고석은 정릉을 오래 지켰다. 책에 없는 얘기지만 아들 셋은 자연 속에서 성장하여 훗날 다들 예술가가 된다.
정릉 골짜기로 출입한 인사들은 이중섭, 한묵을 비롯해서 구상, 차근호, 김이석, 이기련, 황염수, 오영진, 김병기 등이 있었다. 대학에 강사로 나간다고 정릉에 양복을 입고 온 김수영에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격에 맞지 않게 무슨 꼴이냐고 박고석이 농담한 것이 가슴에 맺혔는지 김수영은 이후 양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와 명예보다 인간 이면과 예술을 파고드는 이런 이야기는 언제든 흥미롭다. 박고석의 그림과 스케치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