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 / 박목월
청파동(靑坡洞) / 박목월
밤 늦은 청파동
마지막 합승을 타고 가면
숙대입구 가까운
어느 막다른 골목은
비어 있었다.
그 골목은
강소천의 가랑잎처럼 바튼
음성이 깔렸는데
소천은 어디로 갔느냐.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정 가까운 밤
마지막 합승을 타고 가면
빈 골목은 두렵다.
발목이 잠긴 가로등이 있어
빈 골목은 더욱 두렵다.
-『경상도의 가랑잎』, 1968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감상 : 강소천(1915∼1963)은 함경도 고원 출신이다. 1941년,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 하늘 한 번 쳐다보고 /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 구름 한 번 쳐다보고”(‘「닭」’ 전문)가 실린 동시집 『호박꽃 초롱』을 출간한다. 함흥 영생고보 선생이었던 백석이 세 살 아래인 늦깎이 제자 강소천의 시집에 서시를 얹어 축하를 해주었다. 그 서시는 “하늘은 / 울파주(울타리)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로 시작해서 병아리와 호박꽃과 흰구름과 개울물을 사랑하는 시인 강소천을 하늘이 더욱 사랑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흥남 철수 때 가족을 두고 남한으로 내려온 강소천은 이산가족의 아픔 속에서 남은 생애를 아동문학을 위해 헌신한다. 1957년 어린이헌장을 제정하는 데 힘을 보탰고, 1960년 아동문학연구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모임을 주도한다. 이때 동갑내기 박목월(1915∼1978)도 창작분과를 맡아서 함께 참여한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의 편집위원으로 나란히 참여하기도 했다.
문청 시절 편지 교류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피난 시절 이후 강소천이 서울 청파동에서 새로 살림을 내고, 박목월이 청파동과 원효로 일대에 자택을 두고 대학 출강을 다니면서 종종 만나게 된 걸로 보인다. 청파동은 푸른 언덕(靑坡)이란 뜻인데 일대에 그런 언덕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기도 하고, 남쪽 한강 변의 푸른 물결(靑波)로부터 연유한 이름이란 설도 있다. 강소천과 박목월 두 사람은 삼사십 대의 푸른 시절을 이 곳에서 보내고 강소천의 자택 가까운 숙명여대 부근에서 자주 만났을 것이다. 강소천이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았다고 하니 두 사람은 차와 커피를 마시면서 늦도록 인생과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중에 강소천은 그리워하던 북쪽 고향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저쪽 세상으로 먼저 건너가고 만다. 나이 오십을 채우지 못했다. 우연찮게 이 골목에 다시 왔을 박목월은 거리 가로등에 붙박이고 만다. 강소천의 빈 자리가 휑하다. 이제 이 골목은 암만 붐벼도 박목월에겐 “빈 골목”일 뿐이다.
이후 박목월은 강소천의 묘비 뒤편에 인사를 새기고, 『강소천 아동문학전집』 발간에도 도움을 준다.
“병아리를 볼 적마다 / 우리는 소천을 생각하리라. / 병아리가 쳐다보는 그 하늘에 / 미소로 살아나는 / 소천에게 우리는 / 인사를 보내리라”(「소천에게」 중)는 조시도 남겼다. 백석이 축시를 쓰던 마음과 박목월이 조시를 쓰던 마음이 담담하게 스친다. 백석, 강소천, 박목월, 또 그 후로 이어지는 인연을 생각하며, “인연은 갈밭을 지나는 바람”(「이별가」)이라던 박목월의 육성을 조용히 듣는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