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고춧가루 / 조한수

톰소여와허크 2022. 6. 20. 21:47

고춧가루 / 조한수

 

 

가을이 마당에 내려앉은 어느 날

조상님들 묘 이장 보상금 신청을 위해

고향인 밀양 당숙 집에 갔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나는

당숙을 부모로 생각했으며 당숙께서도

집안의 종손인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셨다

밀양에 나노복합융합 단지가 건설되면서

생활 터전 모두를 잃게 되었으며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농사일을 놓지 않으셨던 당숙

이제 보상금 받아 딸들이 사는

진해로 이사 간다고 하셨다

묘 이장 보상금 신청을 마치고

집으로 모셔다드리니

까만 비닐봉지에 고춧가루 다섯 근을

이중, 삼중으로 포장하여 주시며

이 고춧가루가 이제 마지막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나는

땡초 고춧가루는 아니지예?’하며 딴청을 피웠다

올해 김장김치는 엄청 매울 것 같다.

 

-『애인, 홍두깨, 2022.

 

감상 시인은 한 그릇의 윤기 자르르 흐르는 / 따뜻한 시밥”(눈물)을 지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실패한 시를 쓰고 있다는 자탄 속에서 고통과 눈물을 내주고라도 시 한 편을 얻고자 하는 순정한 고민도 피력한다.

시의 뿌리가 삶이 맞다면 시를 고민하는 일은 결국 삶을 대하는 자세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시인이 시를 앞에 세운다고 해서 삶이 둘째로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시를 대하는 지극한 자세만큼은 높이 사게 된다.

시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허다한 사람의 허다한 이론을 존중할 뿐 삼박한 대꾸가 늘 궁하다. 이즘의 생각은 시란 것도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기록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위의 시가 그렇다.

시인은 고향집 당숙을 찾는다. 시인에게 당숙은 평범한 오촌 아재가 아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시인에게 부모의 정을 느끼게 해준 분이다. 외지에 살다가 고향에 들를 때마다 안부를 묻고 지내왔을 텐데 그 당숙도 이제 고향을 뜨게 되고, 마지막 소출인 고춧가루를 건넨다. 시인은 땡초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밀양은 청양고추 재배를 제일 많이 하는 곳이다.

고향 당숙 집에 들른 장면을 어렵지 않게 묘사하던 시인이 받아 든 것은 고춧가루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흐르는 매운 정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의미 있는 순간을 기록하되, 남에게도 울림이 있게끔 말을 아끼면서 진의가 통하도록 애쓰는 데서 시의 묘미가 생긴다는 걸 알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