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몽상가의 턱 / 김혜천
톰소여와허크
2022. 6. 25. 02:39
몽상가의 턱 / 김혜천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고미술품 노점상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비스듬히 턱을 괸 몽중사유상을 모셔왔다
몽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뇌에 자극을 주어 유연하게 한다 굳어버린 일상 속에서 저 아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세계를 보게 한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내 창에 걸터앉은 그대여
나를 바람 되게 하여
산을 날게 하고
바다를 걷게 하고
달을 베어 먹게 하고
꽃 이파리와 입맞춤하게 하고
고뇌하고 절망하였다가
다시 살아
시공을 넘나들게 하여
새로운 우주를 도모하게 하면서
몽(夢) 중에도 찾아와
내 영혼을 깨우는 그대여
나 이제 사는 날까지
그대 맞는 마중물
자리끼 놓아두려오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시산맥, 2022.
감상 –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장면이라면 우선 조각상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 우선 떠오른다. 회화로는 고흐의 <앉아 있는 시엔>(1882)이나 <의사 가셰의 초상>(1890)을 간신히 떠올리는 정도가 내 수준일 텐데 김혜천 시인이 만난 <몽중사유상>은 그 구입처가 인사동 골목의 고미술품 노점상이란 것을 감안하면 일반 서양 조각이나 그림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보고 있는 조각(그림)이 어떤 것인지 쉽게 떠오른 건 아니다.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턱을 괴는 모습이 전부다. 몽상가의 턱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여간 아닌지 시인은 대상에 푹 빠져있다. 시인의 의식은 한껏 고양되어 상상의 문턱을 넘나들며 산을 날고 바다를 건너는 기분마저 낸다.
모험 의식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건 형상 자체일 수도 있고, 그 형상을 보는 시인의 특별한 감수성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 작용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몽상도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림(조각)에서 시인으로, 시에서 독자로 번져가는 중이다. 여기에 애써 경계를 가르고 구별심을 낼 이유는 없다. 그저 <몽중사유상>을 즐거이 사유(私有, 思惟)하면 되는 것이다.
마중물로 먼저 인사하는 주인을 만났으니 노점상까지 온 조각(그림)의 운명은 말년 운이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다. 고흐 손을 떠난 가셰의 초상처럼 살림을 부하게 해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런 몽상은 연꽃 차를 공양하기 좋아하는 시인의 안중엔 없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