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톰소여와허크 2022. 9. 14. 16:42

 

박규리,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미술문화, 2017.

 

 

- 유영국(1916-2002, 울진)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박규리 시인이 쓴 책이다.

유영국은 울진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제2고보(경복고) 다니던 중 담임과 불화로 자퇴한다. 당시 학교 미술 선생이었던 사토 쿠니오 선생이 일본 본토의 도쿄 문화학원 교수로 부임해간 것이 계기가 되어 문화학원 미술부를 선택해서 유학길에 오른다. 문화학원은 이중섭, 문학수, 김병기 등도 스쳐간 곳이다.

귀국 후 죽변항에서 큰 어선의 관리자가 되어 어획고를 높이는 데 신경쓰고 있을 무렵 김환기의 주선으로 서울대 응용미술과 전임으로 가게 된다. 당시 학부장은 장발, 교수과장은 김용준인데 이후 우익적 성향의 장발과의 갈등으로 2년 반 만에 사표를 썼다고 한다.

전쟁 통에 고향 울진으로 내려온 유영국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수익을 내던 도중 1953년 전쟁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과 함께 제 3회 신사실파전에 작품 네 점을 내서 참여한다. 저자는 이 시기에 이르러, 유영국이 자신이 나아갈 추상의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1957년 유영국은 이규상, 박고석, 황염수, 한묵 등과 함께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해서 참여하게 된다. “보수적인 관전(국전)을 견제하면서 건전한 화단 풍토를 육성하고자 한 모던아트협회는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다고 할 만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평이 있다.

유영국은 산을 많이 그린 작가다. 고향 울진의 응봉산이 그렇게 좋았으며,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영국은 추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연을 점점 구체화시켰으며, 그렇게 하여 구체적으로 귀납된 자연이 바로 산이었다. 장엄하면서도 경쾌하고 환상적인 그만의 추상의 산. 유영국은 점점 더 순도 높은 색으로 절묘한 산들을 아름답게 탄생시켰다. 강렬한 원색은 태초의 원시림처럼 빛을 발했고, 색의 대비가 극명할수록 산은 더욱 신비하고 고적해졌다고 저자는 적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이렇게 저렇게 궁금해하는 아내에게 유영국은 생각하는 대로 보아라라고 했다고 한다. 추상을 읽거나 미를 느끼는 방법과 정도의 개인차를 존중해주는 말씀으로 들린다. 추상이 귀납된 자연이라면, 그것으로부터 애초의 것을 다시 연역하고 싶어하는 심리도 보편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론, 추상보다 구상에 더 많은 시선이 가지만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작품에 묘한 긴장과 재미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산을 주로 그린 작가 중에 모던아트협회를 함께했던 박고석 화가(1917-2002)도 있다. 박고석의 산 그림에선 구상과 추상에 반반 걸쳐져 있는 듯한 인상을 받지만 유영국의 그림은 추상의 요소가 훨씬 많으면서도 정체를 드러낼 듯 말 듯한 구상적 요소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쪽에 더 끌리는지 섣불리 말할 일은 아니다. 작품마다 다를 것이고, 작품을 접하는 그때그때의 배경과 심리에 따라 또 달라질 것이니 말이다.

유영국이 슬럼프를 지나오며 갖게 되는 연륜을 나이테에 비유한 걸 두고, 저자는 끝없이 자기가 이룬 세계를 무너뜨리며 새롭게 도약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나이테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가의 고민이 이 지점에 있는 것도 같다.

유영국의 자녀 네 명은 모두 해외 유학파다. 장녀는 공예가, 막내는 건축가, 장남과 차녀는 유영국미술문화재단에 이름이 보인다. 재단 홈페이지(http://www.yooyoungkuk.org/)에 시기별 작품 여러 점을 만날 수 있다. 유영국의 삶과 작품에 대한 비평문도 잘 모아두었으니 내킬 때 읽으면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