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미도다방 / 전상렬

톰소여와허크 2022. 12. 5. 16:55

미도다방(美都茶房) / 전상렬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어떤 햇살은 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떤 햇살은 서릿발에 앉아 있다

정여사의 치맛자락은

엷은 햇살도 알뜰히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얘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얘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얘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 놓고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 나눔문화사, 1995.

 

 

감상 성곽도시였던 대구는 읍성을 허물고 성곽의 존재를 거리 이름에 남긴다. 지금의 약전골목 거리가 남성로이고 남성로는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된다. 남성로의 한쪽 끝은 대구역를 향해 동성로로 이어지고, 반대쪽 끝은 태평네거리 방면까지 서성로로 이어진다. 종로는 동성로와 서성로 사이의 길이다. 남성로 중간쯤에서 출발하여 종로초등학교와 경상감영까지 닿는 길인데 남성로 그 초입에서 중앙로로 빠지는 샛길을 두고 흔히 진골목이라고 칭한다. 달성 서씨 집거지로 알려진 골목 안쪽엔 서화가로 이름난 석재 서병오 선생의 생가터가 있고 그를 기리는 흉상과 벽화가 새로 꾸며져 있다. 미도다방은 바로 옆인데 골목 바깥에서 안으로 이전해온 자리다.

미도다방 앞 골목엔 육개장, 육국수, 부침개 안주가 좋았던 진골목식당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피해를 이기지 못하고 32년 만에 결국 폐업 절차를 밟았다. 길 하나를 건너 이어지는 진골목 입구엔 이전의 한옥을 리모델링한 스타벅스점이 생겨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오래되어 쓰러지는 것들과 새롭게 일어나는 것들이 대조되어 쓸쓸한 감이 있다. 골목 끝 지점에 1947년부터 이어오는 정소아과가 있다. 2세가 영업을 재개한다는 소문도 있지만 문이 열린 것을 본 기억은 없다. 화교 건축가가 지은 정소아과 건물 자체도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하니 상업 자본에 넘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미도다방 단골로 알려진 전상렬 시인(19232000)은 찻집보다 술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대표적 애주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없어진 옥이집이나 아직 영업 중인 행복식당 등에서 동료 문인들과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 여름엔 자택이 있는 봉덕동 옆 방천에서도 마시고, 술에 취해 다리에서 떨어지거나 논두렁에 자전거를 처박고 쓰러진 일들이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런 중에 교육자로 제자를 가르치며 열세 권의 시집을 냈으니 술이 그런 에너지의 바탕이 아니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그의 경상중학교 제자 도광의 시인도 비슷한 전철을 밟아서 스승의 단골 술집과 찻집까지 동료 문인과 어울려 부지런히 다녔다. 도광의의 뒤를 잇는 대건고 제자들도 문단에 다수 있다.

미도다방은 전상렬, 도광의 등 문인이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명 서화가와 그 뒤를 잇는 제자들이 많이 출입하는 곳이다. 다방 내부는 이들이 기꺼이 두고 간 서화로 인해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정여사로 불리는 정인숙 선생도 글씨에 조예가 깊다. 위 시에 묘사된 것처럼 미도다방은 햇살이 놀고 있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는데 채광 시설이 잘 되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엷은 햇살도 알뜰히 모은다는 정인숙 선생의 존재감 때문에 그럴 것이다. 정 선생은 명망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르신들에게 두루 잘하고, 나이 있거나 적거나 모든 손님을 귀히 여긴다. 이런 생각은 정 선생이 독거노인을 보살피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긴 할 것이다.

현재 미도다방 입구엔 전상렬 시인의 미도다방(美都茶房)’미도다향(美都茶香)’으로 제목이 바뀌어 게시되어 있다. 애초에 미도다향으로 쓴 것을 시집에 고쳐 적거나, 아니면 미도다방이라고 쓴 것을 누군가 미도다향으로 바꾸어 썼을 수도 있겠다. 타묵 서법으로 알려진 이홍재 작가의 현판 선물엔 미도다향으로 표기되어 있다. 글씨야 어찌되었던 미도다방의 향이 전상렬 시인에게 이 시를 완성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미도다방의 대표 메뉴는 쌍화차다. 전병과자는 그냥 따라오는데 요기가 될 만큼 푸짐하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미도다방에 오면, 단순한 시간벌이 그 이상의 차 한잔 값의 추억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