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푸른역사, 2022,
감상 – 미술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그림 감정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답게 근대 경성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화가와 서화가(書畵家)들의 면모와 작품 양상을 종횡으로 자유로이 엮어서 출간한 책이다. 때로 주거지나 출신으로, 때로 인간관계로, 때로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로, 무엇보다 작품 그 자체로 화가의 삶과 예술을 조망하고, 여기에 풍성한 에피소드까지 곁들여 놓았기에 책 읽기가 우선 즐겁다. 서촌과 북촌으로 나뉜 두 권의 책을 따라 읽으면, 화가들의 천국이란 유럽의 파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물론, 천국은 예술가들이 득시글하다는 수사일 뿐 대개의 예술은 이런저런 부침과 좌절 속에 깊어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주제별로 나뉜 이야기 중에, 서로 관련 있는 화가 몇 명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 보자. 창덕궁 담장을 따라 골목을 오르면,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집이 나온다.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처음 시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화가 재능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 없다. 고희동은 안중식(1861∼1919)과 조석진(1853〜1920)에게 얼마간 사사한 경험이 있다. 청진동의 안중식은 화원 화가 장승업에게 배웠으며, 서화미술회를 이끈 장본인이다. 안중식은 을사늑약에 항의하며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며 <민영환 혈죽도>(1907)를 《대한자강회월보》에 싣기도 했다.
고희동의 교류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그림으로 <연북향남(硏北香南)>(1924)이 있다. 북쪽에 벼루가 있고 남쪽에 향로가 있다는 화제는 오세창이 썼다. 벼루를 갈기도 전에 매화 향이 났겠지만 그림을 통해 향이 온전히 간직될 것도 같다. 고희동의 그림에 고희동, 박한영, 최남선, 오세창이 나란히 앉아 있다. 탑골공원 근처인 돈의동 오세창의 집이 배경이다.
고희동은 이종우 함께 중앙고보와 휘문고보를 오가며 그림 선생을 했고, 그 영향 아래 중앙고에서 김용준, 이여성이 나왔고 휘문고에서 서동진, 이쾌대, 장발, 이승만 등이 배출되었다. “중앙, 휘문 두 학교를 다닌 화가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이여성, 이쾌대 형제이다. 이여성은 중앙고, 이쾌대는 휘문고를 다닌 후 화가로서 활동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둘 다 월북하는 비운의 삶을 공유한다”며 이들 형제를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생진 시인의 시 「내가 백석이 되어」에 등장하는 장발(1901∼2001)이 누구인지, <이상과 구본웅>을 그린 삽화가 이승만(1903∼1975)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던 기억이 내게 있다. 작가는 장발에 대해선 따로 장을 두진 않았지만 책 끝의 ‘찾아보기’ 목록에서 인명을 찾아 들어가면, 장발은 휘문고 담임 시절에 화가 이쾌대와 조각가 김종영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예술원 회원까지 한 사실이 부분 부분 확인된다. 친형인 장면 부통령의 실각 후 장발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조명이 덜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승만에 대해선 그의 책 『풍류세시기』를 접하고서야 궁금증이 풀렸지만 이 책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승만의 호는 살구 씨의 의미를 행인(杏仁)인데 몸집이 작아서 그렇게 불렀단다. 안석주, 김중현, 이제창, 김복진 등 이승만의 옥인동 집에 몰려드는 일군의 화가들을 구본웅은 초기 동경 유학파와 구분하여 옥동패로 불렀다. 깔끔하고 인자하고 언변 좋은 이승만은 이들의 좌장 역할을 한다. 이승만은 자기만큼 키가 작은 소설가 박종화와 짝이 되어 『금삼의 피』, 『임진왜란』, 『세종대왕』 등 역사소설에 삽화를 많이 그린다.
작가는 10여 점의 작품이 전하는 이제창(1886∼1954)을 기억해야 할 화가로 꼽는다. <독서하는 여인>(1937) 두 점에 대해서도 빛의 표현이나 원근의 처리가 자연스런 작품으로 평한다. 이승만이 소장하고 있었던 <채석장> 그림을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작품으로 여기며, “그가 유학 후 조국에 돌아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여건 때문이겠지만, 혹시 조국의 현실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채석장> 속 인물들의 고단한 삶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소회를 남겼다.
작가는 일제 강점기 하의 서촌을 억압된 상황 속에서나마 예술의 문화 해방구로 표현한다. 서양화 쪽에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옥동패가 있었고 궁정동에 정현웅과 이쾌대가 있었다. 문학 쪽에선 누상동에 김송과 윤동주, 누하동에 노천명, 통인동에 이상, 필운동에 염상섭이 있었고, 동양화 쪽에선 누하동에 이상범, 궁정동에 이한복이 있었음을 작가 글을 보며 메모해둔다.
서예가 중엔, 추사 김정희와 120년의 간격을 둔 검여 유희강(1911〜1976)을 한국 서예사의 보석 같은 존재로 언급한다. 유희강은 한국광복군 주호지 대장의 비서로 일하는 등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다른 많은 예술가들과 구별된다. 관훈동 통문관 건너편에 검여서원을 열어 서예 연구와 후학 지도에 나섰고 통문관 이름을 직접 써 주기도 했다. 유희강은 화가 친구 배렴이 죽자 만장을 쓰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결국 오른쪽 반신 마비가 되어 서예를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유희강은 왼손으로 10개월 만에 이전만큼 쓰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의 서예 세계는 ‘우수서(右手書) 시대’와 ‘좌수서(左手書) 시대’로 나뉜다. 이러한 재기는 세계 서예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불굴의 인간승리”라고 작가는 촌평한다.
한글 서예를 개척한 남궁억과 이만규, 이후 이만규의 딸인 각경, 철경, 미경이 이룬 한글 서체에 대한 이야기도 새롭고 흥미롭다. 여운형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던 이각경의 글씨는 각경체로 북한에서 사랑을 받았고, 남쪽에 남은 이철경의 글씨는 갈물체로 불리며 남한 한글체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황정수 작가는 근대 화가의 삶과 작품을 찾아 지치지 않고 곳곳을 다니며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당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이 고달팠지만 아름다웠던 덕분”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