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두더지 / 이병각

톰소여와허크 2023. 1. 27. 11:19

 

두더지 / 이병각

 

할망이는 두더지를 산 채로 붙들었다. 모가지를 노끈으로 홀쳐 가지고 이십 리나 먼 땡볕 길을 더듬어 서울에 들어왔다. 삶아 짠 산나물 몇 죄기를* 길거리에 편 다음 산나물을 사든지 두더지를 사든지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든지 마음대로 해보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정(午正) 부는 소리도 벌써 한 나절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점심을 치른 기운으로 걸음을 빨리 걷기만 하고 두더지와 산나물은 돌아다보려는 기척도 없었다. 두더지는 할망이보다 훨씬 빨리 지쳐서 기운 하나 없이 착 늘어졌는데 햇볕을 본 덕으로 눈이 까져버려서 비위가 틀리지는 안 했으려나, 할망이는 요기할 생각이 나지 않은가 궁금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 할망이 산나물 두더지 셋이서 모두 집 생각이 간절하였다.

 

* 죄기를 : 산나물 익힌 것을 손으로 뭉쳐놓은 것(?)

 

-《조선일보(1936.6) / 김용직, 이병각 문학전집(푸른사상사, 2006)

 

 

감상 : 이병각 시인(19101941)시인과 유산이란 수필에서, 악의 꽃을 썼던 보들레르의 진가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필요했듯이 시인이란 언제든지 그가 땅속에 묻힌 뒤 그가 남겨 놓은 책상 서랍에서 발견되고 그 유산으로 그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이니 오늘 이 땅이 소심한 시인들은 이처럼 평범한 교훈마저 잊어버린 양 모두들 조급에 사로잡혀 있음을 슬픈 일이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이병각 시인도 적잖은 시와 산문을 쓰고 두더지와 같이 좋은 작품들이 보이는 데 반해서 충분히 호명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동향의 이병철 시인(19211995)도 월북과 함께 잊히었다가 근래 나막신같은 작품이 조명되고 있다.

이병각의 시 한 편을 읽는 마당에, 전집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정리해본다. 이병각은 영양 두들마을 출신이다. 재령 이씨인 석계 이시명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안동 장씨인 장계향(경당 장흥효의 딸)을 맞아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갈암 이현일은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로 이어지는 퇴계 학문의 큰 줄기를 잇는다.

석계의 후손 중 이수명은 석간 고택을 짓고 또 그 후손인 소설가 이문열은 아버지 월북 후 이 곳에 내려와 유년을 보낸다. 석간 고택 옆은 유우당이다. 이 곳의 주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이돈호다. 이병각(19101941)은 큰아버지인 이돈호의 조카이며 어린 시절을 유우당에서 보낸다.

이병각은 안동을 거쳐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 전에 이미 광산 김씨 문중에서 아내를 맞이한다. 또한 이병각은 김종길 시인의 외숙부가 되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읜 김종길을 각별히 더 챙긴다. 이런 인연으로 뒷날 김종길은 이병각 전집 마련에 힘을 보태게 된다.

이병각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유우당 뒤편의 산은 광려산이다. 이병각은 광려산 산허리 잔디밭을 좋아했다.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며 구름 흘러가는 미지의 세상을 그리워하곤 했다. 아버지를 졸라 망아지를 사서 잔디밭에 풀어놓고 그 망아지가 자라서 준마가 되면 낯선 세상으로 떠날 작정도 했다. 그 무렵 아홉 살 이병각에게 큰아버지는 천리마를 의지해서 재능을 틔우라는 의미의 의여천리구(倚汝千里駒) 하필대가편(何必待加鞭)’이란 글귀를 써준다. 이병각은 자필로 글을 받아쓰며 입춘방 대신 문짝에 붙이곤 했다. 이병각의 호가 꿈꾸는 망아지, 몽구(夢駒)인 이유다.

이병각은 서울 유학 중 무슨 일인가에 의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걸로 짐작함) 이후 < 조선중앙일보> 기자가 되어 자리를 잡는다. 그 무렵 안동 원촌마을에서 대구 남산동을 거쳐 서울로 입성한 이육사 형제와 가깝게 지낸다. 이육사는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유우당의 큰어머니가 이육사 집안에서 온 사람이었기에 이병각은 이육사를 자연스럽게 형님으로 부르며 따랐고 이육사와 가까웠던 신석초와도 각별한 사이가 된다.

이육사는 신석초와 다섯 살, 이병각과 여섯 살 차이가 나지만 그들을 벗으로 대하며 서로 유머가 깃든 말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는다. 요양차 경주 지나 포향에 이른 이육사에게 이병각은 해수욕장에서 보약을 먹고. 우리들은 그러한 형편이 구름 바깥일이니 바라지도 않으나 내가 못하는 호화로움을 형이 곧잘 누리리니 사촌 매답(買畓)보다는 조금 배가 더 아픕니다라며 장난스런 어조로 빨리 서울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육사는 분명 편지를 보며 웃음을 띠었을 것이며 이병각 못잖은 짓궂은 답장을 보냈을 걸로 짐작이 된다.

이병각은 이육사, 신석초와 함께 명동 일대를 줄곧 다녔지만 정작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고 대신 차와 커피 그리고 담배를 즐겼다. 수필 차의 육체와 정신에서 술 먹는 사람에게 청렴의 정신이 없다면 이는 정말 주정뱅이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이 차당(茶黨)에게도 청렴이란 귀여운 정신이 있어야 한다. 기름기란 대체로 속되고 청초하지 못한 것이니 이와 상극되는 차는 그것을 훑어냄으로써 청렴하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차당(茶黨)의 윤리로서 청렴을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문장에서 기름기를 싫어하고 청렴한 것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데 이때 이병각이 즐겼던 차는 커피다.

1938년경 이병각은 10살 연하의 여자와 살림을 내고 본처를 영양으로 내려 보내게 된다. 마침 직장을 그만둔 데다 딸 셋을 낳은 조강지처를 내친 꼴이 되어 고향에서의 송금도 끊어지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이 생활고와 겹쳐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그의 생명을 단축시킨 것으로도 보인다. 이병각은 어린 아내 옆에서 신이여 우리에게 참되게 살려는 뜻을 저버리지 말고 행복 된 앞날을 주소서. 건너편 회나무 가지에서는 부엉이가 울고 있다. 불길한 새인지 복을 가져오는 새인지는 알 수 없다.”(‘부엉이’)고 적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병각의 두더지는 읽으면서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퍽 재미나고 인정어린 시 한 편이다. 산문 느낌의 따스한 정서는 1936년 벽두에 내놓은 백석의 사슴의 영향도 있어 보이지만 백석이 다음해에 내놓은 함주시초의 노루, 선우사의 정서가 또한 두더지와 가까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개연성도 있어 보인다.

시 속엔 할망이가 두더지를 잡는 장면부터 파장까지 활동 영상이 흐른다. 주연은 할망이뿐만 아니라 두더지, 산나물까지 공동 주연이다. 할망이는 점심도 못 먹고 두더지든 산나물이든 팔리기를 기대하지만, 점심을 먹고 기운을 차린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할망이가 내놓은 것에 관심이 없다. 요기를 못한 할망이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라 할 만하지만 시인의 눈은 두더지와 산나물의 상태도 동일선상에 놓는다. 더위에 지친 것은 두더지이기도 하고 산나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평북 정주의 백석이 그러했듯이 경북 영양의 이병각 역시 생명 가진 것을 모두 귀하게 생각하는 생태주의적 정서가 몸에 배여 있었음을 한 편으로 시로 확인할 수 있다.

할망이 산나물 두더지 셋이서 모두 집 생각이 간절하였다는 마무리도 평범하지는 않다. 셋 다 고단한 상태인 것을 읽어 주고, 셋 다 각자의 집을 그리는 마음을 읽어 주는 마음바탕엔 따스한 인간미가 있고 그걸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재치도 있다.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평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그려진다. 이러한 이유로 할망이의 안타까운 하루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영양 두들마을에 가면, 광려산 산허리에서 망아지와 함께 뛰면서 먼 곳을 응시하던 소년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