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살구 / 민구식

톰소여와허크 2023. 2. 8. 03:05

 

살구 / 민구식

 

살구나무 집 손 씨 할매

마루 끝에 앉아 꽃비 바라본다

 

저 나무 심을 때 둘째 딸 낳고 시아버지가

심심해하면서 심은 건데

내리 셋이나 더 딸을 낳으니

그만 뽑아 버리려는 것을 큰딸이 매달리고 말려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씁쓸히 웃으신다

 

그 딸이 시집을 가서 또 딸만 셋이여

삼 일만 살구라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삼 년만 살자고 해서 살구꽃이라든가

 

눈 한번 잘못 돌리면 꽃구경도 못 하는 살구꽃은

여우비 내리듯 우산 펼까 말까 하다가 지고 마는

절정이 짧다

 

떨어진 것들만 주워 먹는 살구는

열매마다 멍든 상처가 깊다

기구한 팔자가 살구꽃 같다면서

내년에도 내가 살구꽃 볼려나

살구 팔자 같은 할매

한숨이 길다

 

-『자벌레의 성지, 시산맥사, 2022.

 

감상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어는 행()이다. 살구씨는 한약재로 널리 쓰이며 따로 행인(杏仁)이라고 불린다. 살구나무 뿌리는 씨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듯한데 한자어 행()을 보면 입 구 자() 모양의 뿌리 부분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식물 뿌리는 영양분을 흡수한다는 점에서 사람 입과 그 쓸모가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살구 열매는 과실 중 가장 일찍 익는, 가난한 입에 요긴한 구황식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구가 살고에서 나왔다는 말도 꽤 설득력 있게 들리는데 민구식 시인도 이를 놓치지 않는다.

손 씨 할매의 시아버지가 살구나무 심은 뜻은 말 그대로 심심해서 인지, 더할 나위 없이 심오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우연찮게 살구나무 심은 이래 딸부잣집이 된다. 어른의 뜻은 딴 데 있었는지 살구나무를 뽑아내려는 걸 딸이 막는다. 그 딸도 딸부자가 된다. 손 씨 할매는 이런 대물림이 기구한 팔자인가 싶다. 딸로서 살아가기엔 좋은 날보다 궂은날이 많았던 시대에 딸 한 명 한 명이 감당하고 헤쳐 나가야 할 운명에 마음이 시렸을 것이다.

매화가 질 무렵 살구꽃은 핀다. 둘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살구꽃 꽃받침이 상대적으로 뒤로 젖히는 면이 있고 살구나무 수피와 가지에서 좀 더 붉은 느낌을 받는다. 꽃이 잠깐 피었다가 금방 지는 건 비슷하지만 살구꽃이 더 그런 듯도 하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우산 펼까 말까고민하는 사이란다. 짧기에 살구꽃 그늘은 환하기만 하고 짧아도 결실할 것은 결실하는 법이라서 열매 시절이 온다. 쉬 떨어져 멍든 살구에서 시인은 살구 팔자 같은 여인의 한과 상처를 읽어주고 보듬어준다.

문득, 떨어진 살구를 주워 한 해 살구씨 오천 개를 모았다는 담양 사는 김성중 시인이 생각난다. 김성중 시인은 포항 사는 민구식 시인을 만나면 아마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까. 살구꽃이 아닌 살구 자체가 주는 위안도 그만큼 환하고 깊을 것이라고. 그럼, 민 시인은 또 어찌 답하시려나.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