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女子 / 오규원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감상 - 이 시로 말미암아 물푸레나무는 암수 성별과 상관없이 여성 이미지를 담뿍 갖게 된다. 물푸레나무 이파리의 뒤쪽 잎맥에 솜털이 있고 쇠물푸레의 흰 꽃이 유난히 솜털처럼 모여 피기도 하지만 솜털이 여성의 전유물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한 잎의 솜털에서 시작하여 한 잎의 맑음, 한 잎의 영혼으로 옮겨 가서 마침내 “女子만을 가진 女子”를 부르는 순간, 남자는 반대편에 서서 오로지 여자를 기리는 존재가 된다.
시인은 「한 잎의 여자」에서 자그마치 열여덟 번이나 여자를 부른다. 여자(女子)의 계집 녀(女) 형상은 두 손을 단정하게 모은 자세로 알려져 있지만 생명을 안고 보듬는 피에타 상이기도 하다. 대개의 성인 남성은 그런 사랑에 빚진 철부지 시절을 지나오며 이성에게서 모성을 찾기도 한다. 모성이 되기도 하고 이성이 되기도 하는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는 자식에게든 연인에게든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모습에 대한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시인은 그런 사랑의 최대 수혜자로서의 남성을 대신하지만 받은 사랑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기에 여자에 대한 그의 기림은 순진하면서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일방적 추종 대신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로 상투성을 피해 간다. 자기 삶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에 감사와 박수를 보내면서도 개개인이 주체인 삶에서 보면 한 쪽만 그늘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스스로의 꿈, 사랑, 자아실현을 함께 해나가는 다른 선택지를 펼치지 못한다면 이도 건강한 모습은 아닌 것이다. 시인이 “병신”이란 공격적인 단어를 고른 데는 그 내면에 상대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손 치더라도 여자(女子)에 갇혀 지내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분명 있어 보인다.
여자를 “시집”에 빗댄 함의는 시집에 대한 각자의 인상만큼이나 다양하겠다. 누구에겐 없어도 그만이거나 쓸데없는 수고가 되고 말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꿈꾸게 하고, 일상을 의미 있게 하고, 그 고민으로 불면을 마다하지 않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이미지를 툭 던지고 그 이미지의 파장을 즐기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납득되게끔, 상상되게끔 만드는 건 결국 시인의 남다른 감각일 것이다.
물푸레나무 한 잎의 여자! 살면서 어느 때고 “한 잎의 맑음”으로 뇌리에 깊게 박힌 상대가 있을 테고, 그 상대를 기려서 이렇듯 노래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지극한 사랑 끝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로 사랑이 결실하기를 바라지만 이도 헛된 바람일까. 이제 시인은 가고 없고, 물푸레나무 한 잎에 열중했던 순간만 한 편의 시로 남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