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조지훈,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 문음사, 1977.
- 조지훈(1920-1968) 시인 사후에 출간된 산문 모음집이다. 책의 제목 『흘러간 내 영혼의 먼길』은 시인의 시 「낙엽」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전략) 하나 둘 구르는/ 낙엽을 따라// 흘러간 내 영혼의/ 머언 길이여// 바람에 낡아가는/ 고목 등걸에/ 오늘도 하루해가/ 저무는구나”로 마무리되는 시편이다.
인용 수필 중 ‘돌의 미학’은 돌이 가진 추상의 미를 조지훈 시인 자신의 인생과 결부지어 쓴 글이다. 일본 쿄토 묘심사 정원의 돌,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산방에서 일 년 남짓 머물면서 바라본 돌,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마주했던 피가 도는 돌, 피난지 대구에서 바라본 집채보다 큰 바윗돌 얘기를 한다. 이후 성북동에 서른세 해를 머물며 주변 산세와 암봉에 마음 주며 바위의 묘경(妙境)을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오대산 시절은 나물만 먹는 창자에 술만 무한히 퍼서 뼈만 남은 몸으로 스스로 바위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대구 바윗돌에 와서야 시인은 돌로부터 사나운 의지를 발견하고 그 바위를 혁명의 돌로 명명한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고 적고 있다.
조지훈 시인이 마음에 담은 집채만 한 바위가 지금은 남아있을 성싶지 않지만 만약에라도 바위가 남아있고 이를 누가 알기라도 한다면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석탑 몸돌에 문고리 장식만 두어도 문 안쪽의 숨은 세계를 그리게 되는데 아예, 석문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은 더없이 신비롭고 즐겁다. 시인의 고향인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을 모델로 한 「석문」이란 시도 생각난다. 이때의 석문은 오해로 꽉 닫힌 문이다.
‘주객(酒客) 아니라는 성명’에선 자신을 주객으로 칭하는 것에 대해서 수주 변영로와 같은 쟁쟁한 선배 앞에 주름 잡는 것 같아 물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막걸리는 한 말, 약주는 대포로 스물세 잔에 이르렀던 주량을 슬쩍 내보이는 것으로 보아 주객이란 이름이 아주 싫지는 않은 눈치다. 시인은 주졸(酒卒)의 학주배(學酒輩)를 자처한다. 오욕칠정의 감정을 실어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고, “술은 언제나 무료와 권태의 극복을 위해서 마실 때가 상책”이라고 말한다. ‘술은 인정이라’ 편에선 술에 취해 친구 문간방에서 잔다는 게 남의 집에 들어가 자게 되고, 그 집 주인이 이를 허물하지 않고 아침 해장술까지 받아 주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동도풍류(東都風流)’에선 스물세 살 조지훈이 경주를 처음 찾았을 때의 이야기다. “그날 황혼에 경주역(정확히는 건천역임)에 내리자 초면의 시우 목월이 마중을 나왔었다. 조용한 여관방에 들어앉아 둘이서 법주를 마시며 밤늦도록 시를 얘기하고 세월을 얘기하였다.”고 했다. 시인은 일주일 정도 경주 고도를 여행하며 옥산서원에서도 하룻밤 잔다.
‘등산임수탄(登山臨水嘆)’에서 산에도 가지 말고 물에도 가지 말고 감나무 밑에 나가서 어리고 못나게 사는 것도 삶의 방편이란다. “나는 다시 감나무 및 막걸리 자리로 가야겠다. 우리의 별유천지(別有天地)로 돌아가서 감나무집, 석류나무집 상량문이나 한 장 쓰고 석굴암 동해안에서 울지 못한 이 감회를 술잔 속에서나 풀어야겠다.” 고 했다. 감나무집과 석류나무집, 말대가리집은 마해송, 최정희, 권태호 등과 어울리던 피난지 대구의 단골 술집 이름이다.
책에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작품 하나는 ‘비둘기’다. ‘비둘기’는 짧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다. 장 콕토의 시 「산비둘기」에 생각이 미친다.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로 대충 번역되는 짧은 시다. 말하자면, 조지훈의 동화 ‘비둘기’는 장 콕토의 시에 등장하는 산비둘기의 운명을 스토리텔링한 본보기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다. 조지훈 시인이 생전에 동화를 더 썼는지, 있다면 어떤 작품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