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향기 / 임미리
해당화 향기 / 임미리
그림자도 숨어버린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찾아 나선 선정암
입구에 들어서니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 진동하네.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해당화 한 무더기
척박한 모래땅 바닷가에서만 꽃 피는 줄 알았는데
정인을 만난 듯 반갑게 마주앉네.
산사의 바람에 얼마나 흔들렸을까.
붉은 꽃잎이 더욱더 애잔해 보이는데
그리운 이를 기다리는 듯 강인하게 피었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먼 곳까지
아련한 향기 한 줌이라도 보내려했을까.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그늘이 보이네.
푸른 가시로 버텨낸 세월이 얼마였을까.
보는 이의 아련함 깊어 가는데
바람결에도 모른 척 잠이 드는 해당화
내일쯤이면 찾아올 그리운 이의 발치에서
더욱더 붉게 피어날 꽃잎 무더기
향기로운 몸짓이 산사를 흔들어 깨우네.
-『물 위의 집』, 불교뮨예, 2022.
감상 – 임미리 시인은 화순에서 태어나 화순에서 일하며, 산문도 쓰고 시도 쓴다. 시인은 자신이 가장 애정을 갖고, 가장 잘 알기도 하는 화순의 지명과 공간, 화순의 역사와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을 때가 많은데 이번 시집도 예외는 아니다.
해당화가 있다는 선정암은 만연사 부속 암자다. 만연사는 동구리 호수공원을 지나서 가며 시인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구리 호수공원을 지날 때면 작가는 “자귀꽃 피면 여름 장마가 시작될 거라 했던가./ 구름은 벌써 알고 하늘을 그러데이션으로 수놓았네” 읊기도 하고, 만연사에 이르러서는 “화우천 지붕 위를 타오른 능소화는 능청스럽고/ 오래된 연인의 보이지 않는 마음은 알 수가 없다./ 능소화 지고 비파 꽃 피면 그때쯤 알 수 있을까” 노래하기도 한다.
해당화는 이름에서 보듯 바닷가의, 물이 잘 빠지는 모래벌판에 군락을 이루며 잘 자란다. 찔레처럼 산기슭에도 자란다고 하나 찔레만큼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거 아닌가 싶다. 대체로 향이 좋거나 열매가 좋거나 한 것은 줄기나 잎가지에 가시가 있을 때가 많다. 해당화 줄기도 잔가시가 유난하다. 가시를 세워 자신을 보호하려는 해당화도 인간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실제 바닷가 해당화도 사람 손을 탄다든지 해서 그 군락지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산중턱의 선정암(禪定菴)에 자리 잡은 해당화도 어떤 인연이 작용하여 예까지 왔을 것이다. 애초에 서해 바닷가 출신일 개연성도 높다. 절 암자에서 뜻밖의 생을 만난 시인은 무연히 지날 생각이 없다. 산 아래 해당화의 고향을 넘겨짚기도 하고 푸른 가시로 버텼을 세월을 읽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산사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기다림의 자세를 견인하고 있는 모습에 마음을 주고 있다.
시인의 뜻은 해당화가 선정에 든 스님처럼 고요하게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보는 해당화는 기다림에 설레며 그윽한 향을 더해가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시인도 해당화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자신의 기다림이 뭔지 해당화에게 되묻는 것은 가능할 것도 같다. 기다림에 지친 날, 만연사 선정암 해당화의 말을 들어보자. 이인성 화가의 <해당화>(1944)를 보는 중에 기다림이 없어도 지친다는 말이 텔레파시로 쓱 지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