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빗물, 습작을 위한 아포칼립스 / 정훈
비와 빗물, 습작을 위한 아포칼립스 / 정훈
태초부터 있으라, 있으라 명령했던 말씀도 저 눈물이 스미는 쓰라림을 창조하진 않았겠다.
저, 저 시큰한 눈물 가락이 모든 통곡의 시초였겠다
벽 속의 창에서 흐느적거리는
저, 스스로 태우지 못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말씀 또한 모든 창조의 씨앗이었겠다
락스를 파는 소아마비 장애자가 포장마차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막무가내로 팔아달라고 조른다
다음에 사지요, 다음에 사지요, 말하는 포차 주인에게 달려들 듯 몸을 자꾸 흘러만 내린다
저, 저어언에도, 다, 다아, 다엄에, 산다꼬 해짜나요오..
땅에 완전히 눌러앉아 붙어 말라버린 자국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들반점』, 함향, 2022.
감상 -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파멸, 종말, 대재앙의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기독교에선 그 어원을 좇아 ‘묵시(默示)’란 의미로 쓰고 있다. 묵시는 신약성경의 요한묵시록처럼 하나님이 계시를 내려 그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주는 일을 일컫는다. 다만, 묵시를 한자어 자체로만 보면, 굳이 말을 내거나 더하지 않고 의미가 드러나도록 한다는 뜻이다.
얼핏 시인은 기독교적 묵시를 차용하고 있는 듯하다. 태초의 창조가 그렇고,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창세기 한 구절이 생각나게끔 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도 슬며시 떠올려지는 건 왜 일까. 흐느적거리며 갇혀 우는 303명의 목숨에까지 시인의 생각이 있었는지 여부는 시인만 아는 비밀로 두는 게 나을 성싶다. 비밀은 발설되지 않는 한만 비밀일 테니까.
대신, 시인은 “눈물이 스미는 쓰라림”의 비근한 예를 들고 있다. 소아마비 장애자와 포장마차 주인의 시비가 눈물겹지 않으냐는 것이다. 주인의 “다음에 사지요”라는 말을 완곡한 거절이나 인사치레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게 상식이겠지만 소아마비 장애자는 말 자체를 짐짓 약속으로 격상시켜 놓고 그 이행을 조르고 있다. 시인은 그 상황을 소아마비 장애자의 억지나 생떼로 보지 않고 삶을 위한 절실한 몸짓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절실함은 포장마차 주인도 마찬가지다. “말라버린 자국”만 남기고 락스 한 통은 또 다음으로 넘어갈 것이다.
습작을 위한 아포칼립스라고 했으니 결국, 초점은 쓰는 거다. 그런 중에 “정직은 관통하는 구석이 있다”(「부산명태찌짐집」)며 정직하게 이웃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고투한 흔적이 『새들반점』에 고루 묻혀 있다. 다만, 문 닫은 가게로 인해 새들반점 짬뽕을 맛볼 수 없다는 게 여간 애석한 게 아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