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 전선용

톰소여와허크 2023. 9. 17. 01:06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 전선용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欺妄)이다

양귀비가 가진 힘이 중독성이라면

아편은 지옥문이 열리는 무덤,

손톱 밑에 혀를 밀어 넣고 독을 빠는 동안

별은 창틀에 끼어 급사했다

황홀하게 익숙한 밤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은 마약과 같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

해무가 그녀라는 소리가 있고

수평선이 그 여자라는 전설이 있다

파랑을 견뎌낸 섬

환락의 껌을 씹는 마법은 착란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계()

문장의 비문처럼 난해한 점의 출처가

사내에겐 못이 됐다

저기 점 박힌 여자,

여기 못 박힌 남자,

꽃 지고 난 자리

시체 투성이다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사, 2023.

 

감상 -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는 남해 여행 중에 구상한 시라고 시인이 발표 지면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남해대교(현재는 노량대교가 주교 역할을 함) 건너 남해 섬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 여행자 기분은 어떠한 것일까. 1980년대 어중간 이곳을 들렀을 이성복 시인은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로 시작되는 남해 금산을 써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남해 금산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를 차례로 읽으면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의 마지막 장면도 생각난다. 영화 속 두 사람의 연애는 결실하지 못하고, 여자는 자취를 감추고 남자는 여자를 찾지 못한다.

전선용 시인이 남해를 찾았을 때 그의 배낭에 남해 금산이 있었는지, <헤어질 결심>을 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연애 감정을 빌려 남해 금산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아와 대상의 존재를 새로 환기하게끔 해준다. 미녀와 양귀비가 통하고 양귀비꽃이 중독과 파국의 위험에 닿아 있는 중에 시인은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마약과 같다고 한다. 연애가 중독인지, 연애 감정이 중독인지 몰라도 남해에 여장을 푼 여행자의 감정 또한 고무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시인은 내면의 열기를 식혀서 번뜩이는 감각과 이성적 언어로 상황을 바꾸는 사람이기도 하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마녀에서 점(·)을 뺀 미녀고 거꾸로 미녀에서 점을 더하게 되면 마녀가 된다. 그런 미녀와 마녀를 좇는 남자도 점이 있다. 그간의 사랑과 수고와 상심으로 인해 가슴에 못 박힌 채 못대가리로 남은 점이다.

여기에 연애 감정과 별개로, 점 하나를 고민하며 언어를 조탁하는 시인의 모습도 겹치게 하는 데서 시의 묘미가 생긴다. 어쩌면 사람 사이 연애보다 시와의 연애 감정이 시인에게 더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진짜 모를 일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에 가까울 것이기에.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