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강명순 역), 『향수』, 열린책들, 1991.
-주인공 그르누이는 파리의 이노셍 묘지 근처에서 태어난다. 사람은 누구나 특유의 냄새를 갖고 있지만 그르누이는 몸에 냄새가 없는 아이이고 이 점이 주위 사람들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너도밤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나무 향을 자신의 피부 속으로 스미게 해서 스스로 나무가 된 듯한 체험을 하며 그르누이는 냄새를 통해 단어를 알아간다.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사람과 사물을 놀라울 정도로 구별해내지만 냄새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 사용엔 어려움을 겪으며 의사소통을 최소한으로 하는 소년으로 성장해간다.
보모의 손에서 가죽을 다루는 무두장이에게 넘겨졌던 그르누이는 파리의 마레 거리에서 너무나 소유하고픈 사람의 향을 맡게 된다. 그 사람을 죽여서까지 향을 들인 그르누이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는다. 가장 위대한 향수 제조인이 되어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후 파리의 향수 명인들을 찾아 도제가 되고 자신의 뛰어난 후각에 “원료를 만들고, 분리하고, 농축시키고, 보존하는 수공업적인 지식”까지 보태며 꿈꾸던 최고의 향수 제조인에 근접해 간다.
그르누이는 파리에 배어 있는 냄새를 거의 다 파악하고 인기를 끌 만한 향을 얼마든지 제조할 능력이 있었지만 세속적인 성공이나 명성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큰돈을 벌 생각도 없었고, 달리 살아갈 방도가 있다면 향수를 만들어서 먹고 살 생각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외부 세계가 그에게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내면이 훨씬 더 놀랍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는 문장은 소설 속 향수 제조자의 속마음이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자존심이 그러하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소설 『좀머 씨 이야기』의 작가이기도 한 그는 세속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여전히 은둔 생활 중이다. 내면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파트리크 쥐스킨트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면 절실하게 품고 평생을 앓아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 그르누이는 비극적인 출생과 함께 주위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로 자란다. 그런 주인공이 자아를 실현하는 내용으로 사건을 전개해도 이 소설은 충분히 좋았을 것이지만 작가는 여기에 연쇄 살인 사건을 입힌다. 살인자는 주인공인 그르누이다. 그는 연쇄 살인의 대가로 얻은 향수를 실험하면서 분노로 가득 찬 유가족과 시민의 마음을 돌려놓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는 승리를 만끽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겨움을 느낀다. 그때의 심정을 토로한 장면을 옮겨 본다.
“항상 갈망해 왔던 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 이 순간에 그 일이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그 향기를 사랑하기는커녕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하고 증오받는 것에서.”라고 했다. 자기에겐 증오만이 진실인 것을 생각하며 그르누이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독백한다.
그르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이노셍 묘지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타인의 증오를 부추겨 스스로에게 죽음을 처분하는 식이니 결과적으로 인과응보가 된 꼴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설득력은 향수에 대한 작가의 지식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허먼 멜빌이 소설 『모비 딕』을 통해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스토리로 녹여낸 것처럼 파트리크 쥐스킨트 또한 향수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공부를 통해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인향만리(人香萬里)란 말이 떠오른다. 남의 냄새의 분간엔 유별한 코를 가졌으면서 정작 자신의 냄새를 놓치고 지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