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의 그림자 / 김옥경
여러 개의 그림자 / 김옥경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가
짙은 안개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긴 칼로
나의 그림자를 잘라내 버렸다
할아버지 안돼요
내 그림자를 돌려줘요
나는 할아버지를 쫓아가 보지만
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다음날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의 그림자를 잘라버렸다
전날보다 선명해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하얀 수염 사이로 내비친다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제발 내 그림자를 돌려주세요
긴 시간 동안 불안증에 헤매던 내게서
나의 그림자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떤 슬픔의 옹이를 만들려고
내 상처는 이리 깊은걸까
목표를 잃어버린 두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허공으로 자꾸만 두 손을 휘저어 본다
며칠 후
할아버지는 잘라낸 그림자를 모아 불을 질렀다
활활 타고 있는 저 불길 속
한 움큼씩 먹어대던
희고 푸른 알약들이 몸부림친다
불빛에 사그라드는 내 그림자
해가 떠오르자 불은 꺼지고 재는 식었다
더 이상 나의 우울은 자라나지 않을까?
-『낮술 한 잔 할래요』, 두엄, 2024.
감상 – 의식을 갖고 삶을 산다고 하지만 그 의식이란 게 빙산의 일부일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많은 부분은 의식 밑바닥에 놓여 있는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는 게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프로이트와 융은 그들의 무의식 분석과 정신분석학 논리를 세우는 데 꿈 해석을 적극 활용한 바 있다. 실제, 꿈을 잘 들여다보면 현실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되는 면도 분명 있을 성싶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몸과 맘이 아플 때는 차라리 위로가 되는 말이기도 해서 크게 부정당하지도 않는 말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 사회적 지원, 이웃 간의 친밀감 등이 평가 요소가 되는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중간쯤 머물지만 자살률만 따지자면 제일 높다고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크고 사회적 지원이나 연대는 느슨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꿈에서 그림자를 거듭 훼손당하는 화자의 모습도 현실의 상처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흔히 그림자를 자신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로 말한다. 그림자를 현실 이면의 ‘어두운 자아’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림자가 현실의 자아보다 더 내밀하고 더 정직하게 자아를 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 이 시에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먼저 할아버지와의 관계, 꿈에 보이는 할아버지의 태도와 이에 대한 화자의 느낌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들이 꿈으로 나타나는 과정에 수용하기 힘든 것을 왜곡시켜 드러내기도 하는 꿈의 기제까지 감안한다면 화자 본인과 상담자만 꿈 해석이 가능할지 모른다.
대강 언급된 것만으로 꿈을 읽자면, 불길에 타는 것은 그림자이기도 하지만 알약이기도 하다. “불안증에 헤매”던 날들과 무관하지 않은 상처가 더욱 깊어지고 우울을 키웠다면 이때의 알약은 그에 대한 처방일 것이다. 불길은 내재된 상처와 우울을 겉으로 드러내어 아우성치게 하며 마침내 재가 되게끔 한다. 샤먼이 된 시인이 화자와 독자를 무의식의 꿈 마당으로 초대한 느낌도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상처와 마주하는 고통과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함께 행해지는 굿판을 지나오며, “나의 우울”은 한결 견딜 만한 것이 되어있으리라.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