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사진 에세이> 문인의 초상
톰소여와허크
2024. 9. 20. 13:10
육명심, 『문인의 초상』, 열음사, 2007.
- 『문인의 초상』은 사진작가 육명심의 문인 초상 사진에 짧은 글을 곁들인 사진 에세이다. 30여 년 출간을 벼르던 책인 만큼 1970년을 전후한 사진이 많다. 문인을 사진에 담되 어느 순간부터 예술가의 옷을 벗긴 인간으로서의 체취와 숨결을 담게 되더라는 서문의 글이 눈에 띈다.
민영 시인 편을 보니. 강원도 철원 출생인 민영은 아버지 따라 만주 간도로 이사를 갔다가 서울 명동에서 담배장사를 하고 남대문 시장 어물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단다. 민영은 부산 피난지에서 땅콩장사를 하다가 인쇄소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서울에서 인쇄소 조판기술자가 되었다. 그런 다음 출판사 편집자, 잡지사 기자가 되어 부지런히 일하는 중에 독서도 하고 시도 썼다면서, “인생의 이력이 이쯤 되면 어찌 좋은 시가, 좋은 글이 나오지 않겠는가!” 했다.
이성교 시인 편을 본다. 수필 『동해 하얀 파도를 따라』에 실린 <왕산골 어머니>를 통해 삼척 출신 이성교의 인간됨을 알겠다고 했다. 왕산골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인데 두 사람은 수양어머니와 수양아들로 평생 서로를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 덧붙이기를 “착하고 마음 고운 이들은 대개 예술가로는 평범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이성교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육명심 작가가 집 마루에서 찍은 가족사진도 참 따스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성기 시인을 찾아갔을 때 이야기는 짧지만 인상적이다. 땡볕에 두어 시간 사진을 찍고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안 나오는데 한성기가 약간 짜증을 냈나 보다. 한 편의 시를 위해 한성기 시인 자신도 퇴고를 끊임없이 거치지 않느냐고 묻고, “사진 촬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쓸 때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듯 사진 작업도 수없는 반복의 연속입니다”란 말을 냈고 서로 전적으로 공감을 이룬 뒤에 사진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고 했다. 사진엔 한성기의 주요 산책로인 둑길이 배경으로 나온다.
책의 표지 사진은 박두진 시인이다. 연세대 영문학과 재학 시절, 박두진 시인의 교양 국어 수업을 들었고 시인들의 사진을 찍는 계기도 박두진으로부터 비롯되었단다. 육명심이 보는 박두진은 <잔나비가 춤을 춘다>는 시로 5.16 군사정변을 비판한 사람이고, 당시에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는 예술원회원 추대를 거절했던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표지 모델이 괜히 된 것은 아니다. <잔나비가 춤을 춘다>의 전문이 궁금한데 인터넷상에선 검색되는 않는다. 박두진 시인은 뒤늦게 작고 2년 전에야 예술원회원을 받아들였으니 이를 탓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 같다.
박두진 시인을 찍은 또 다른 사진 한 장은 도봉산에 함께 가서 셔터를 누른 것으로 보인다. 작고 단단하게 여윈 몸에 등산화로 신은 군화가 시인의 박력을 웅변해 주는 듯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