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산문> 소란

톰소여와허크 2024. 10. 3. 13:03

박연준, 소란, 난다, 2020. / 북노마드, 2014.

 

저자인 박연준 시인은 이십 대 중후반을 지날 때 고흐의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때로 작품 속 시엔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슬픔 속에 있기도 한다. 때로 정도가 심하면 슬픔이 활활 타오르는 죽은 나무와도 같았다는데 시인 스스로의 처방은 슬픔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젖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었다.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독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는 윤동주의 팔복(八福)(1940)을 접하고 시인은 슬픔이 복으로 연결되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고흐의 <슬픔>(1882)이나 윤동주의 팔복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에서, 슬픔에 슬퍼하고 슬픔에서 희망을 찾는 슬픔의 긍정도 느끼게 된다. 슬픔에서 시를 쓰거나 산문을 쓰는 동력을 얻기도 한다는 시인은 세상이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생각에 이른다.

 

사실, 고흐의 작품 <슬픔>을 보면, 묘사된 분위기에서 슬픔의 감정이 1차적으로 전해오겠지만 이후 고흐와 시엔의 삶을 생각하면 더 짙은 슬픔 속에 있게 된다. 고흐는 거리의 여자 시엔과 시엔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하고 생활비를 지원하는 동생 테오의 마음도 돌리지 못한다. 고흐는 사랑엔 솔직했지만 생활엔 무능력했다. 시엔 가족은 스스로 고흐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고흐는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당사자에게 어떤 슬픔으로 쌓여 있을지 헤아리게 되면 슬픔의 추가 마음 바닥에 더 깊이 꽂힐지도 모른다.

 

박연준 시인은 자신을 서자, 변방, , 가시랭이, 꽃받침, 맹장 같은 존재로 여긴다. 가시랭이가 낯설어 사전을 찾았더니 가시 부스러기다. 중심에 있지 못하고 기타 등등 혹은 나부랭이 의식을 자처하는 모양새다. 그런 중에도 음지에 든 볕, 곰팡이에 핀 꽃을 말하며 영원한 음지도 양지도 없다는 주의인데 양지를 지향하려는 마음과는 구별이 되는 듯하다. 시의 거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무의식중에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도 든다.

시인이 좋아한다는 말도 시는 패자가 모두 갖는 게임이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말이다. 타고르가 한용운에게 끼친 영향이라든지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만 주야장천 외던 세대에겐 타고르가 이런 말도 했어 하는 생각이 우선 들 것 같다. 패자가 전적으로 이기는 게 시의 세계라니서자와 가시랭이뿐만 아니라 부대끼며 사는 모든 이웃에게 참으로 다정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박연준 시인은 <슬픔>에 연민을 느끼고, 패자의 편에서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생이 저 떨어지기 직전 가을 나뭇잎 소란같다고여기며,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를 불안때문이라고도 한다. 존재 자체가 불안이지만 불안의 출처나 정체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뿌리에 엉켜있는 것들의 떨림으로 존재한다고 시인은 믿는다. 불안에 떠는 집, 시인이 여태껏 시의 거처로 삼고 있는 집이다. 그 불안 속에서 타인의 <슬픔>에 민감한 마음이 시의 두 번째 걸음이 아닐까하는 개인적 생각을 해본다. 그럼 시의 첫 번째 걸음은혹여,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생각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