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만화! 내 사랑

톰소여와허크 2024. 10. 13. 15:37

박재동, 『만화! 내 사랑』, 지인, 1994.
 
- 박재동 작가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한겨레 그림판을 맡아서 신문 판매 부수 확장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인기 만화가다. 신문 성향과 보조를 맞춘 진보적 시각을 갖고,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도 웃음을 짓게 하는 발군의 솜씨를 뽐냈다.
작가가 쓴 『만화! 내 사랑』은 자신이 만화가가 되기에 이른 과정과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만화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국내 만화의 역사와 주요 특징을 고찰하며 만화에 대한 상식을 한껏 키울 수 있도록 해준다.
박재동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울산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온다. 교편을 잡았다가 몸이 편찮아서 그만둔 아버지는 ‘문예당’이란 만화가게를 인수하셨고, 어머니는 그 가게에서 팥빙수와 풀빵을 파셨다. 아버지는 가게 책상에 ‘금전을 잃는 자는 작은 손해요, 신용을 잃는 자는 큰 손해다. 용기를 잃는 것은 마지막이다.’라고 적어두었단다. 박재동이 살면서 맘에 담았을 구절일 테다. 그때 박재동의 영혼을 흔든 만화책은 『라이파이』와 『약동이와 영팔이』다. 특히, 주인공이 갖은 고생을 하며 펼쳐가는 흥미로운 이야기인 『약동이와 영팔이』 한 질은 아버지가 가게를 정리하면서 남겨둔 유일한 만화책인데 지금껏 작가가 잘 보존하고 있단다.
만화방 아들 박재동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고입 재수 때는 장편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만화를 보는 재미와 만화를 그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던 학생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잠시 교직에 있다가 결국 만화가가 되었다. 작가는 만화를 예술로 보는 데 대해 주저함이 전혀 없다. “예술이 별다른 것이겠는가? 그것은 삶의 표현이다. 자신이 참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그 감동을 타인에게까지 전하는 행위이다. 나더러 예술을 정의해보라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어서 진실과 아름다움의 언저리에 앉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작가는 많은 사물 혹은 사건 앞에 수없이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을 제대로 전하고자 고민했을 것이다.”고 했다.
예술이 어떠한 것인지 그러한 예술을 이루기 위해서 예술가는 또 어떠한 자세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작가 생각이 집약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영향을 준 시사만화가는 대학 졸업 무렵 만난 웅초 김규택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건을 한 단계 위에서 조망하면서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시사만화가의 역할”은 변함없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시사만화를 잘 그리는 방법은 사건의 핵심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도 했다.
박재동 작가는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만화도 일괄한다. 이희재, 오세영 등 몇몇 화가에게 특별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간판스타』를 그린 이희재 만화는 “사회를 보는 섬세한 눈과 인간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부자의 그림일기』를 그린 오세영은 샘이 날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라고 했다. 박재동이 파악한 그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언제나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스케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림 실력은 연습에서 나온다는 당연한 말씀이겠지만 그 당연한 것을 행하는 정도가 다들 다르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다.
 
그 사람이 무슨 책을 읽었느냐가 그 사람을 증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가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박재동 작가가 좋아하는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를 읽으니 박재동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인지도 보인다.
『부자의 그림일기』는 그림 한 점 한 점에 기울인 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등 무거운 주제엔 마음이 힘들어도 누군가는 다루어야 할 소재라는 생각이다. 특히, 표제작인 ‘부자의 그림일기’ 마지막 장에서 어머니의 슬프고 분한 표정을 보았다면 독자도 같은 감정이 되어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슬프고 분한 일을 참지 않고 나서는 어머니가 ‘희망’으로 다가오며 가슴을 벅차게도 해준다. 이희재의 『간판스타』는 박재동의 말마따나 ‘새벽길’, ‘민들레’가 퍽이나 인상적이어서 페이지를 쉽게 넘기지 못하고 뭉클한 마음으로 한참 머무르게 된다.
박재동 같은 이가 생각하는 좋은 만화와 각 연령대의 독자층이 즐겨보는 만화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갖고 있는 듯하다. 박재동은 만화 그리는 일이 대중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만화 장르가 “대중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작가가 어떻게 자기 세계를 지켜낼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훌륭한 자기 단련의 장”이라고 작가는 인식하고 있다. 만화뿐만 아니라 ‘예술 한다는 사람’은 그런 담금질 속에 하나의 완성작을 위해 수많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