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졸업발표회 / 김리영

톰소여와허크 2025. 1. 4. 21:55

 

졸업발표회 / 김리영

 

목선 끝에 나부끼는 몸,

아버지가 보고 싶어, 차마

뱃머리에서 뛰어내릴 수 없네.

풍랑을 알리는 무대 배경.

오른쪽으로 두 번 맴돌아

빠른 장단에 무릎 꿇고,

아버지! 아버지!

판소리 휘모리 가락이 잦아들면

갑판 위로 피어오르는

천공에 눈물 고인 연꽃 화관.

 

무대 바닥이 검은 진흙으로 변하고

커튼콜이 끝나도 오지 않은 아버지.

교문이 닫히도록 기다려본 그 사람.

 

살아서는 한번도 부르지 못한

굳은 입술 풀려나, 버젓이 불러보고 싶다.

 

-『푸른 목마 게스트하우스, 북인, 2024.

 

감상 시인은 무용과를 나와서 무대공연에 나선 춤꾼이기도 하고 이후 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어 실제 현장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그런 경험들이 시의 기본 얼개로 작용하고 있는 시편이 적잖이 눈에 띄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시가 삶에 밀착되어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가족사의 일면이 보이는 졸업발표회도 그러한 시다. 졸업 작품은 무용극 심청으로 보인다.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의 공양미 삼백 섬 약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뱃사람의 제물이 되기로 한다. 인당수에서 자진하는 장면은 심청 자신을 희생하며 효를 실천하는 전반부의 하이라이트지만 근래 들어 아버지, 심청 둘 다 비판받는 문제의 장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욕심으로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면하기 어렵고, 심청 역시 이성적이지 않는 선택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시각이 있다.

어버이를 향한 지극한 마음만은 누군들 부정할 수 있을까 마는 심청이 기계가 아닌 이상 복잡한 심사 중에 원망의 마음도 있었을 성싶다. 심청 역에 투사된 시인 혹은 화자의 마음은 효녀 틀을 벗지 않는 심청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가족의 축하를 받는 졸업의 자리에 아버지는 부재 상태다. “한번도 부르지 못한에서 짐작해보건대 아버지 부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그 연원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의 세 번째 서랍에 든 이마 잘린 사진으로 있는 사람이며, 아버지가 네이버에 떠요에서 보듯 네이버 검색창에 이름을 넣었다가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며, 아버지의 새에서 보듯 자신의 팔, 다리, 어깨 꺾어, 춤 고운 새의 몸짓으로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결핍과 상실 혹은 콤플렉스에서 시의 싹이 시작된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그럴 때마다 진부한 느낌은커녕 그게 진실이란 생각만이 더 오롯해진다. 죽음에서 돌아온 심청이 궁에 갇혀 살 게 아니라 시나 소설을 썼으면 더 의미 있는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