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김춘수,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문장사, 1980.
- 신문연재를 모은 산문 책머리에 적기를, 산업화 사회에서 “도덕의 파괴와 도덕감각 및 도덕적 상상력의 둔화는 인간을 내부로부터 헐어버리는 요소”라고 했으며, 이러한 일에 대한 관심으로 시인은 산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시편에 비해서 산문은 한층 친절하다. <부지런하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을 읽어본다. 바쁘다(忙)는 것은 마음을 어디다 두고 온 상태라서 편치 않아 보이고 불안해 보인다고 했다. 바쁘게 해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삶에 대한 궁극의 목적은 있지만, “그 목적은 달성되지 않고 수단인 바쁘다고만 하는 어떤 상태의 포로가 되기만 한다”고 했다. 부지런다는 것은 좀 다르단다. 『벽암록』의 덕운(德雲) 일화를 예로 들며 치성인(癡聖人- 바보 성인)이 눈을 지고 와서 우물을 메우는 것과 같이, “바쁘다는 상태에 비하면 어딘가 좀 얼이 빠져있고, 촌스럽고 매끄럽지 못한 데가 있다”고 했으며 무능과도 통하지만 유능이 미치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로 시인의 뜻을 드러낸다.
『장자』에도 덕운(德雲) 고사가 있나 보다. 우물물을 빨리 편리하게 퍼낼 수 있는 도구를 쓰라는 자공의 충고에 농부가 답하는 내용이다. 대답인즉, 물을 속히 많이 수월하게 푸고 난 다음에 남아도는 시간을 무엇에 쓴다 말인가 되묻는 거다. 농부의 거절에서 삶의 한 방편이나 재미를 깨친다는 게 시인의 생각이다. 바보스러운 행동을 바로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 쏠림에서 비켜서서 현상을 새롭게 보는 시각은 존중할 만하다. 시인의 고사 인용 취지도 그러할 줄 믿는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은 제목으로 뽑은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대목이다. 첫 문장부터 “시인은 자전거 정도는 몰라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어울리지가 않는다. 자가용차를 가졌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그는 시인의 자격을 포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1980년 상황만 해도 자가용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 전이니 자가용 소유 자체가 부의 상징과도 같았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시인이라면 사치하지 않고 소박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말로 보인다. 이어서 “시인은 프랑시스 잠처럼 지금도 나귀를 타고 패랭이꽃 핀 시골길을 가야 한다. 그런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먼 데서 손님이 오면 막걸리를 대접하고, 마늘찌와 오이소박이를 대접하면서 그것들이 세상에서도 제일 맛있는 음식임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 땅의 것과 서민적인 것을 떠받드는 마음으로 좋게 볼 수 있겠다. 나귀를 타고 시골길을 가는 것처럼 시류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보면 보고 있는 쪽이 민망스럽기만 한 그런 행색이 바로 시인의 그것”으로 꼽는 김춘수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책 출간 이듬해인 1981년, 민정당(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면서 시류에, 그것도 신군부 세력이 주도하는 힘의 흐름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8년 전두환 퇴임식에 맞추어 헌시를 쓴 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때로 무능하게 비치고 때로 바보스럽게 굴기도 하는 삶, 자전거 타고 다니며 마늘장아찌 안주로 막걸리 한 잔 나누는삶이 시인다운 삶이라고 말하던 김춘수 시인은 ‘꽃의 시인’, ‘존재 탐구의 시인’이란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지만 그 칭호의 매력은 기득권에 붙은 출세의 삶과 함께 상당 부분 반감된 걸로도 보인다.
김춘수 시인의 산문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는 2025년 현재 중고책방 가격이 10만 원 정도로 책정되어 있다. 비싼 가격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사서 읽기엔 부담이 된다. 내가 읽은 책은 프린트 출력물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 서비스 대상 책이라서 협약 도서관에서 인쇄비 얼마를 내고 출력한 것으로 기억된다. 지식과 정보의 평등한 나눔과 수월한 접근을 위해서라도 원문 서비스를 늘리고, 그 서비스 혜택을 각자 집에서도 누릴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