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석재 서병오 필묵에 정을 담다
이인숙, 『석재 서병오 필묵에 정을 담다』, 중문출판사, 2018.
- 시서화 세 분야에서 최고 경지까지 보여준 서병오(1862∼1935)에 대한 글이다. 책 내용 중 서병오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던 부분 위주로 메모를 새로 해본다.
서병오의 글 스승은 허훈과 곽종석이다. 허훈의 막내동생은 의병장 허위이고 서병오는 관헌에 쫓기는 허위를 숨겨준 인연이 있다. 곽종석은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다.
또 그림과 글씨로 서병오에게 영향을 준 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이하응으로부터 석재(石齋)란 호도 받는다. 이하응의 스승인 김정희의 영향도 받는다. 서병오는 김정희가 강조했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인문학적 소양을 체득해간다.
김정희 글씨가 많이 남아있는 영천 은해사와 울산 통도사에 서병오의 글씨도 보인다. 은해사 편액 중 <대본산은해사종무소>, 통도사 극락암 편액 중 <三笑窟(삼소굴)>, <好快大活(호쾌대활)>은 김정희 풍의 서병오 글씨다.
서병오는 1901년, 1909년 두 번의 상해 방문 시 묵란을 잘하는 민영익과 교류하며, 그곳의 손님인 포화의 병을 치료해주며 인연을 쌓는다. 서병오 임종 시에도 포화의 대련 <절문지향>과 묵죽도 <죽석 서병오에게>가 벽에 걸려 있었다. 포화가 지녔던 벼루 ‘충석유방(忠石流芳)’은 민영익을 거쳐 서병오에게 왔다가 현재는 수묵화가 서세옥이 소장하고 있다.
서병오는 1922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조직하고 시서화 연구뿐만 아니라 전람회 개최에도 중심 역할을 한다. 시서화의 스승으로 여러 제자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중에서도 배효원, 서동균, 김진만 등이 주목을 받는다.
죽농 서동균은 서병오의 명정을 쓰면서 후계자로 공식 인정받는다. 그간의 사정은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 긍석 김진만은 서병오의 조카사위이며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한 ‘대구 권총 강도 사건’으로 8년 4개월 복역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김진만이 먼저 죽은 뒤 스승인 서병오는 추모시 3수를 쓰는데 그 마지막 장을 옮겨본다.
난초와 계수나무 꺾인 소식 차마 못 듣겠네 蘭摧桂折不堪聞
인간만사가 모두 뜬구름 되었구나 萬事人間盡化雲
슬피 혼백을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데 沼悵靈魂招不得
옛산에 낙엽만 비 오듯 어지럽게 떨어지네 舊山黃葉雨紛紛
저자는 서병오의 기생 관련 시서화를 찾아서 꼼꼼하게 분석한다. 해당 인물과 시서화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도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지만 여기선 줄인다.
서병오는 시서화 삼절 외에도 거문고, 바둑, 장기, 의술, 약재에도 능해 팔능거사로 불린다. 바둑과 장기 실력은 이하응의 총애를 받는 이유도 되었다. 이러한 서병오의 능력은 천성적인 것도 있겠지만 여유 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그 여유를 뭔가를 몰입해서 배우는 데 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끝으로, 서병오의 다재다능함을 대하는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 부분을 인용해둔다. “서병오는 시서화의 예술을 동반한 풍류객의 삶을 살았고, 그러한 삶은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호정(豪情)을 필묵으로 풀어낸 서화세계로 승화되었다. 서병오의 시 중에 ‘隨意歡娛卽上流(수의환오즉상류)’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의 뜻대로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이 곧 상류 인생일 것이다”라는.
저자가 소개한 구절의 시 전문을 찾지는 못했어도 즐기는 자가 상류란 말엔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다만, 즐겨 마땅한 ‘뜻(意)’을 품는 데 적잖은 시간과 고민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