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녹슨 그림 / 정일관

톰소여와허크 2025. 3. 9. 19:08

녹슨 그림 / 정일관

 

 

짐칸, 녹이 잔뜩 슨 바탕 위에

그림 그려 넣은 낡은 트럭 한 대

쿨럭거리며 지나간다.

 

돛단배 한 척, 갈매기 세 마리,

바다 위의 섬 하나,

구름이 떠 있는 안타까운,

하늘까지 그려놓았네.

 

돌멩이로 긁어서 그렸을까,

쇠못이나 공구 따위로 그렸을까.

짐 부린 뒤에 담배 한 대의 여유로

먼 고향 아니면 옛사랑의 거처를

새긴 것일까.

 

밤새 화물을 나르는

트럭의 숨소리에

생애가 거칠게 녹슬어가도

그리움은 갈매기처럼 울고

세월은 바람 따라 출렁이는데,

 

철야의 어둠이 다하여

아침 빛 돌아올 때

주섬주섬 그려놓은 마음 한 조각

도드라져 반짝이고 있네.

 

-『, 푸른사상사, 2024.

 

감상 캐나다 어촌마을에 태어난 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의 삶과 예술을 다룬 <내 사랑>(2016)이란 영화는 그해 최고의 영화란 개인적 생각을 갖고 있다. 왜소한 체형에 관절염으로 손에 기형이 오면서 주변으로부터 소외되는 시절도 겪었으나 모드 루이스는 그런 불운을 견디며 씩씩하게 자기 삶을 가꿀 줄 안다. 가난한 어부와 결혼한 이후에도 갈등은 이어지지만 차츰차츰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게 되고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날이 오게 된다.

위 시에서 트럭에 그렸다는 그림에서 모드 루이스의 항구 그림이 우선 생각났다. 두 그림을 연상하면서, 섬과 갈매기 또 구름이 있는 바닷가 풍경이 머릿속에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물결이나 그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 등 세부는 많이 다를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모드 루이스는 벽이나 종이에 물감을 써서 그렸고, 트럭 화가는 트럭 짐칸 어디엔가 쇠못이나 돌멩이 조각을 이용해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다리로 바깥출입이 싶지 않았던 모드 루이스와 화물 운송에 쫓겨 자기 시간을 갖지 못하는 트럭 운전사가 당장의 현실을 벗어나서 자신이 놓여 있고 싶은 순간의 꿈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드 루이스의 그림이 모드 루이스의 삶과 별개로 그림을 접하는 독자에게 아름다움과 낭만적 느낌을 선사하듯이 트럭 그림을 읽는 시인도 먼 고향 아니면 옛사랑의 거처까지 떠올리며 도저한 낭만성을 뽐내다가 그 경계에서 애써 현실을 환기하는 걸 잊지 않는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망각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밤새 화물철야의 어둠을 거듭 쓰면서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물 운송 노동자의 다수는 자기 차를 가지고 사용자 혹은 위탁 업체와 계약을 맺는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회사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 52시간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서 과로사가 잦은 택배기사도 비슷한 경우다.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하는 안전운임제 도입 등으로 과로, 과속, 졸음운전 등을 줄이고 있다지만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녹슨 그림을 보며 아름다움 대신 안타까움을 먼저 말하는 건 이런 현실에 대한 시인의 감수성이자 양심이다. 그런 표현의 바탕엔 누구든 얼마간 일하고 얼마간 휴식을 취하는 평등의 바다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을 줄 안다. 물감으로 그렸든 철필로 그렸든 바다의 배, 갈매기, 구름을 보며 거기에 깃든 마음 한 조각을 읽는 것도, 자신의 마음 한 조각을 얹는 것도 다 귀해 보인다.

트럭 그림은 볼 수 없으니 모드 루이스의 것을 찾아 일렁이고 반짝이는 것이 있는지 한 번 더 그림을 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