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블랙피쉬, 2018.
- 제목이 눈길을 끈다. 미술 작품을 실제 눈으로 감상하는 것과 사진으로 인화된 것을 보는 건 차이가 많겠지만 특별히 여건이 허락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세상 곳곳에 있는 명화를 두루 감상할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런 중에 방구석에서 미술을 즐길 수 있다니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원화를 못 보는 한계는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직접 현장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만 있다면 방구석 미술관이 오히려 더 풍성한 것을 제공할 수도 있겠다. 그 풍성함의 바탕엔 미술에 대한 애정, 애정에서 시작된 공부, 공부가 쌓인 깊이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 『방구석 미술관』으로 확인하게 된다. 두 화가 이야기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고갱이 유망한 증권회사를 그만둔 결정적 이유를 저자는 페루 본능으로 언급한다. 진보주의자인 고갱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3세의 집권에 실망해서 아내의 고향인 페루로 향하던 중 사망한다. 그때 젖먹이 아이였던 고갱은 페루에서 6년간 머물다가 친할아버지 유산을 받기 위해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마음이 페루의 자연에 가 있던 고갱은 선원이 되어 국제상선에 몸을 싣고 5년간 세계 곳곳을 누비다가 어머니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증권회사에 다니며 아마추어 화가로 그림에 관심을 보이던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 세잔 등을 만나며 그림에 더욱 이끌린다. ‘직장인의 길’과 ‘화가의 길’을 고민하던 고갱을 도운 건 불경기 영향으로 증권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이란다.
그림으로 기운 고갱에 대해서 저자는 “고갱은 태생부터 태초의 자연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때의 황홀함을 잊지 못해 5년 동안 배를 타고 원시의 자연이 있는 지구 곳곳으로 간 그였죠. 결국 고갱은 본능적으로 예술을 부여잡았고, 이내 ‘원시와 야생’을 자기 예술의 근원으로 삼기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후 고갱이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타이티 행을 강행했던 것도 결국 원시와 야생에 대한 동경이고 그 이면엔 페루의 경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삽화로 제시된 고갱의 <마리아를 경배하며>(1891)를 두고, “태초를 꿈꾸지만, 여전히 문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고갱의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말한 근거는 원주민 모자의 모습이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그림만 보면, 원시와 문명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둘이 한데 섞이고 어우러진 모습으로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도 같다. 그 자연스러움이 있기 전까지의 처절한 고뇌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응당 그러하다고 하겠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그의 연인 가브리엘레 뮌터의 관계도 흥미롭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을 나온 법학도지만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보며 그림으로 쏠리는 운명을 예감한다. 독일 뮌헨으로 간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뮌터를 만난다. 둘은 그림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아내와 별거한 칸딘스키는 뮌터와 5년간 유럽을 여행을 떠난다. 서로를 그림으로 그리고 뮌헨으로 돌아와 화실도 함께 쓰지만 얼마 후, 칸딘스키는 아내에게도 돌아가지도 않고 뮌터에게도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로 가서 27살 연하의 여자와 결혼한다.
추상회화의 대가인 칸딘스키의 행보보다 뮌터의 이후 행보에 관심이 가는데, 뮌터는 상처 속에서도 새로운 동반자를 만났으며, 노후엔 칸딘스키의 기억이 있는 무르나우의 집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친다. 말년의 뮌터는 자신과 칸딘스키를 포함한 청기사 작품 100여 점을 기증하기도 한다. 저자는 뮌터의 <새들의 아침 식사>(1934)를 소개하며, “외로워 보이지만 함께 나눌 빵이 있습니다. 함께 온기를 보태는 새들을 보며 그녀는 누군가를 그리고 또 기다립니다”고 적었다.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 그들의 외로움과 기다림을 헤아려보기 좋은 방구석 미술관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