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의 자비심/ 이강옥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거가 끝났다. 선거 기간 동안 그분들이 내세운 공약 중에서 '학생들의 학력 향상', '우수대학 진학률 제고' 등 의 문구가 두드러졌다. 나는 그 공약들에서 오늘날 우리 교육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를 만나지 못했다. 대구 지역이 광주 지역보다 적은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했다고 기자회견까지 하며 학력 향상을 위해 다그치겠다던 어느 교육감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나서일까?
LG 경제연구원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상위 20% 고소득층이 지불한 과외비가 하위 20% 저소득층이 지불한 그것의 5배에 가깝다는 통계 결과를 발표했다. 이것은 91∼97년에 비해 크게 확대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외비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납입금과 교재비, 심지어 전체 교육 비용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추세이면 곧 저소득층 자제들이 고소득층 자제들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교육에서 돈은 교육 써비스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최근 세칭 일류대학 합격생의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 출신 이라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어느 경영학자는 오늘날 가장 실속있는 투자가 교육 투자라 했다. 그래서인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선 자식 교육에 돈을 투자하는 것 같다. 많은 돈을 주고 누리는 교육 써비스는 선행학습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그 수혜자가 다음 단계의 학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지속적인 투자를 통하여 그 우위를 빼앗기지 않게 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학원은 겨울방학 때마다 "6학년 서울대반 모집"이란 광고문을 내건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석차가 대학 진학 양상을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허황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중등학교 저학년 학력 석차가 학생들이 타고난 자질이나 노력보다는 이른 시기에 그들이 받는 선행학습에 의해 결정되고 또 그 석차가 대학 입학까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교육이 가지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얼마나 냉혹한 제도인가를 말해준다. 돈의 여유가 있는 부모는 교육을 통하여 자식이 여유있게 살도록 해주겠지만, 돈이 없는 부모는 충분한 교육 써비스를 확보해주지 못하여 자식이 경쟁 대열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그냥 바라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탁월한 천재는 그 모든 악조건을 넘어설 수 있다는 특별한 예를 들어 이런 현실에 눈감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보다는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한 아이들은 앞으로 더욱 자기 자질을 계발할 기회를 갖기 어려울 것이라는 개연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이번 선거에 참여한 분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공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가진 자가 더 가지도록 하는 것이 공교육인가? 가지지 못한 자도 좀더 좋은 여건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공교육인가? 유감스럽게도 이번 선거의 공약과 정견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집안의 아이들도 양질의 공교육을 잘 받아서 가난의 한계를 넘을 수 있게 해 주려는 의지보다는 집안의 여유가 있어 사교육의 선행학습을 잘 받아 우위를 점하게 된 아이들이 보다 많이 우수한 대학에 가도록 해주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의 공교육은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인재양성이란 미명하에 가진 자들이 자식 교육에 더 많은 돈을 더 유용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경제학이 아주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라도 교육의 이름으로 기꺼이 할 수 있을 때 진정 떳떳해지는 것이다. 공교육은 그 누구보다도 가지지 못한 가정의 자제들에게 자비심을 베풀어야 한다. 고액 양질의 과외를 받을 수 없어 자포자기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공교육의 책임을 진 분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양질의 사교육을 능가할 정도로 공교육의 수준을 드높이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아이들도 공교육만으로도 충분히 타고난 자질과 능력을 계발하여 정정당당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 영남일보 <영남시론>, 2002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