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716

녹슨 그림 / 정일관

녹슨 그림 / 정일관  짐칸, 녹이 잔뜩 슨 바탕 위에그림 그려 넣은 낡은 트럭 한 대쿨럭거리며 지나간다. 돛단배 한 척, 갈매기 세 마리,바다 위의 섬 하나,구름이 떠 있는 안타까운,하늘까지 그려놓았네. 돌멩이로 긁어서 그렸을까,쇠못이나 공구 따위로 그렸을까.짐 부린 뒤에 담배 한 대의 여유로먼 고향 아니면 옛사랑의 거처를새긴 것일까. 밤새 화물을 나르는트럭의 숨소리에생애가 거칠게 녹슬어가도그리움은 갈매기처럼 울고세월은 바람 따라 출렁이는데, 철야의 어둠이 다하여아침 빛 돌아올 때주섬주섬 그려놓은 마음 한 조각도드라져 반짝이고 있네. -『별』, 푸른사상사, 2024. 감상 – 캐나다 어촌마을에 태어난 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의 삶과 예술을 다룬 내 사랑>(2016)이란 영화는 그해 최고의 ..

감상글(시) 2025.03.09

개 아들 면회 가기 / 권선희

개 아들 면회 가기 / 권선희  나대지 일궈 농사짓는 양반이 찾아와 고라니 지킬 개 한 마리 달라지 않겠나 큰 놈 세마리도 속이 시끄러븐데 메칠 전 해피 저놈아가 새끼를 다섯이나 낳아부렀으이 우째 다 키울꼬 걱정하던 차에 얼씨구나 싶어 방울이를 딸려 보내지 않았겠나  그날 밤 비바람이 을매나 억시게 불어제끼는지 방울이 걱정에 날밤을 새운 기라 그 양반이 목수라 집을 잘 지어준다꼬는 했는데 제아무리 목수라도 하루 만에 집을 지었겠나 난생처음 혼자가 된 우리 방울이헌테는 얼마나 무서운 허허벌판이었겠냔 말이다  여서 걱정하는 것보담 내사 마 면회를 가는 기 낫지 싶아가 아침 일찍 앤 나섰나 도꼬마리는 떼로 달라붙제, 밭둑 흙은 줄줄 흘러쌓제, 그 어린것이 이 낯선 데서 우옜을꼬 싶아가 내사 마 미친 드키 기올..

감상글(시) 2025.01.19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 김민기 어두운 비 내려오면처마 밑에 하나이 울고 서 있네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벌판에 하나이 달려가네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산 위에 하나이 우뚝 서 있네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1972) 감상 –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버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중학교 때 미술반을 하고 진학도 서울대 미대로 했지만 고등학교 때 선물받은 기타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기타는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셋째누나가 선물해준 것이다. 미대에 진학한 후 김민기는 듀엣 ‘도비두’(도깨비 두 마..

감상글(시) 2025.01.11

졸업발표회 / 김리영

졸업발표회 / 김리영 목선 끝에 나부끼는 몸,아버지가 보고 싶어, 차마뱃머리에서 뛰어내릴 수 없네.풍랑을 알리는 무대 배경.오른쪽으로 두 번 맴돌아빠른 장단에 무릎 꿇고,아버지! 아버지!판소리 휘모리 가락이 잦아들면갑판 위로 피어오르는천공에 눈물 고인 연꽃 화관. 무대 바닥이 검은 진흙으로 변하고커튼콜이 끝나도 오지 않은 아버지.교문이 닫히도록 기다려본 그 사람. 살아서는 한번도 부르지 못한굳은 입술 풀려나, 버젓이 불러보고 싶다.  -『푸른 목마 게스트하우스』, 북인, 2024. 감상 – 시인은 무용과를 나와서 무대공연에 나선 춤꾼이기도 하고 이후 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어 실제 현장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그런 경험들이 시의 기본 얼개로 작용하고 있는 시편이 적잖이 눈에 띄는 것은 그만큼 시인의 시가 삶..

감상글(시) 2025.01.04

바다와 나비와 사랑 / 박덕규

바다와 나비와 사랑 / 박덕규  나도 한때 누군가를 바다를 헤엄쳐 갈 만큼 사랑한다고생각한 적이 있다. 그 사람 사는 데가 섬인지바다 건너 어떤 대륙인지도 모르면서실은 헤엄도 못 치면서헤엄쳐 가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거다. 바다를 건너다 그냥 지쳐버릴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거다.바다가 왜 파란 줄도 몰랐던 거다. 아무리 거칠게 날갯짓을 해도가 닿지 않을 사랑이 있다는 것을젖은 날개가 다 찢긴 뒤에야 깨달았던 거다.  - 『날 두고 가라』, 곰곰나루, 2019. 감상 -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1939)가 생각나는 시다. 박덕규 시인은 「바다와 나비」에 ‘사랑’을 더하면서 시 내용이 ‘사랑’으로 확 기울게끔 한다. 김기림의 것은 표면적으론 사랑과 무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긴 한다. 시 전문을..

감상글(시) 2024.12.18

화방사 꼬마 / 윤중목

화방사 꼬마 / 윤중목 경상남도 남해군 망운산 화방사에는일곱 살 난 꼬마둥이가 살았더랬지.송씨 성 가진 사내애였어.세 살 때 아빠가 데리고서 절에 며칠 묵었는데읍내에 볼일 보고 온다며 가서는 돌아오질 않았대.하는 수 없이 스님들이 맡아 키웠다는군.종무소 보살 말씀이 그래.그 아이 어린이집 수첩에도부모란에 ‘스님’이라 적혀있었고. 저녁 공양 후, 사흘째 본 내 얼굴이 익었나수수께낀지 스무고갠지 옆에 착 붙어 종알대더니만아저씨 등 가렵다고 등 긁어달라네?녀석 반죽이 좋은 건가 사람 손길이 그리운 건가,옷 속으로 손을 넣어 스슥슥 삭삭 긁어줬지 뭐.아 시원해!, 하며 이번에는 글쎄 배도 쓸어달래요.반질반질 아이 피부가 감촉이 썩 괜찮더라만공연한 인연 만들어질까 슬쩍 염려가 되고.그때 코앞으로 빨따닥 일어나 앉..

감상글(시) 2024.12.08

꽃여울은 강물 따라 / 한명희

꽃여울은 강물 따라 / 한명희 늙은 배롱나무 한 그루병든 제 무릎에여린 뿌리 하나 앉히고 떠나갔다 삼백육십오일불볕에 모진 바람조울증 같은 날씨 버티고 이겨낸 여름날 무성한 잎새가지마다 그리움인 듯그리움인 듯 꽃여울 붉다 어미는 길게 뻗은 가지들 두 해째 새순 돋지 않았어도어린 새순 곁을 지켰다 콘크리트가 주변을 꽉 막아물길이 막혔어도 등 꼿꼿이 펴고빗물 몇 모금 어린 잔가지들에 흘러가도록 등을 토닥였다 아기 나무는 알고 있을까죽은 어미가 뿌리 깊숙이 감춰둔 젖줄을 타고살이 오르고 꽃을 피운 것을  어미가 떠난 자리 딛고 일어나 어미가 되는 것을강물이 강물을 이어 강이 되는 것을  -『참, 미안한 일』, 시와사람, 2024. 감상 – 새순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고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

감상글(시) 2024.10.29

눈이 오는 이유 / 김규태

눈이 오는 이유 / 김규태  눈이 오는 이유를 묻거든,떨고 있는 겨울나무들이순백의 잠사옷을 입고 싶어서라고, 눈이 오는 이유를 묻거든,산과 깊은 계곡의 기복을 메워주기 위한 평등주의 때문이라고, 다시 눈이 오는 이유를 묻거든,그늘진 시궁치에 사는 빈자를 위해하느님이 희고 따뜻한 손길을 내린 때문이라고, 그래도 눈이 오는 이유를 묻거든,사악한 자들의 어둔 가슴을 밝히려는흰 꽃의 수많은 등이 되기 위해서라고, 눈이 덮이는 이유, 그것은너와 나의 심저에 싹 트고 있는 맹종의검은 씨앗과 차가운 역사의 들녘을 적시는 표백행위라고, 그러고도 눈이 오는 이유를 되묻는다면,더 대답할 길이 없다.  -『들개의 노래』, 빛남, 1993. 감상 - 김규태 시인(1934〜2016)은 대구에서 나고 부산에서 자랐다. 국제신문 ..

감상글(시) 2024.10.22

복지과 가는 길 / 이명윤

복지과 가는 길 / 이명윤 복도를 걷는데 등 뒤에서달그락달그락 운다구두 뒷굽의 구멍이 돌을 삼킨 것노인이 걸음을 뗄 때마다 어느 날구두를 찾아온 슬픔이 말을 거는 것이다이 건물엔 복지과가 없다는 말은도무지 들은 체 않고 달그락달그락,풀 한 포기 없는 복도를 따라오며연신 중얼중얼거린다 먼 나라 어느 부족의 주문 같은중얼중얼, 바람이 불 때마다어디선가 노인의 가슴이 삼킨 돌들이정신없이 말을 거는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쯤이야 거꾸로 뒤집어탁탁 치고 그래도 안 되면쿠폰 한 장으로 조용할 수 있겠지만중얼중얼은 어떻게 하지 달그락달그락, 중얼중얼,말을 탄 노인이 쉬지 않고 황야를 달린다 분명 이 세계 어디엔가태양처럼 떠 있을, 복지과를 찾아서 -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사람, 2024.  감상 – 노인을 ..

감상글(시) 2024.09.17

살포시 아는 집 / 강미정

살포시 아는 집 / 강미정 살얼음이 붙잡은 징검돌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집이 있었다살포시 아는 집이었는데추운 뜰에서 종일 기다려도 섭섭지 않았다집 안으로 들려면 울타리인 탱자나무 가시를 건너야 했다가시 사이 쭈글쭈글 말라서 단단해진 탱자 열매의 고신한 적막도 건너야 했다하루를 묵으면 빛 들지 않은 묵은내가 저 기억 끝에서부터 몰려왔다추운 생각들로 온몸을 떨어야 했다밤새도록 쪼그리고 앉아 조는 어린 나의 몸을 건너야 했다우린 살포시 아는 사이야,수십 년을 건넌 안면인 내게 처음 했던 말을살포시 하곤 했다벽이 흐려지고 문풍지 떠는 소리가 선명해지기도 했다나에게서 벽이었던 사람조차도때론 나를 견디게 한 힘이었음을,나에게서조차 나는 살포시 아는 사이였음을 왜 몰랐을까,혼자 엎드려 젖은 발을 감싸고 있는살포시 아..

감상글(시) 202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