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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를 부린 날 / 손인선

멧돼지를 부린 날 / 손인선 고사리밭 한가운데멧돼지가 내려와 파헤치고 뒹군커다란 흔적 겁먹은 고사리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였겠지울타리 대나무도 파랗게 질려사그락사그락 도움을 구했을 테지 그중 용감한고사리 씨앗 몇과 진드기 몇은멧돼지 등에 올라타고산으로 가겠지 커다란 멧돼지가바람처럼 달릴 때햇볕 잘 드는 양지쪽에폴짝 뛰어내렸을 테지 죽다 살아났다고바짝 올라붙은 가슴을쓸어내렸을 테지 친구들에겐야생 멧돼지를 부리며 왔다고허풍 조금 보태서자랑삼아 말할 테지 -『멧돼지를 부린 날』(손인선 시, 장은희 그림), 청개구리, 2025. 감상 – “엄마는/ 맹자 엄마 흉내 내는데/ 나는/ 맹자 흉내 내고 살아야 하나?/ 나답게 살아야 하나?(「나의 고민 - 맹모삼천」 중) 좋게 보면, 고민이 거의 어릴 적 맹자 수준..

감상글(시) 2026.09.03

들이치는 폭설 / 윤창도

들이치는 폭설 / 윤창도 산 정상에 올랐을 때부터 쏟아붓는충만한 진눈깨비벌려 놓은 계절의 끝을 여며 닫으려는지산골짜기 깊게 팬 주름을 덧칠하며 덮고 있다휘몰아치며 자지러지는, 겹겹이 치는 하늘 장막떠나온 산길되돌아가자니 너무 멀리 와 버려서 걱정 태산길하염없이, 하염없이 덤벼드는 무심의 눈발도깨비바늘처럼 착착 몸에 달라붙는다고함 내질러도 켜켜로 쳐 놓은 빗장 열지 못할 공포시야를 점점 좁혀 오고 있다 빽빽이 우거진 눈보라산길 끊어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다속눈썹 젖어 오는데, 아이젠도 없이급작스레 하늘 그물에 걸려든 망막한 마음준비 덜 된 노후와 닮은 첩첩의 두려움서늘한 무늬가 쳐져 있다 진눈깨비는 어둠을 몰고 저녁을 훔치러 오고 있다 -『물의 얼룩이 올챙이라니』, 시산맥, 2025. 감상 – 갑작스런 ..

감상글(시) 2026.08.30

오디세이

크리스토퍼 놀란, 2026 영화 오디세이>를 봤다. 호메로스 원작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희미하지만 영화가 원작보다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와 성찰이 돋보인다는 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원작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로 옮겨가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가 소식이 끊긴 사이, 아내 페넬로페를 겁박한 안티노우스가 영화 속 최고 악당인데 칼싸움 실력은 신통찮다. 안티노우스는 오디세우스의 은혜를 입은 입장인데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구혼자 그룹의 선두 주자가 되고 말았다. 이 부분만 따져서 세게 비판하면 안티노우스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비운 지 20년이 지났고 전쟁 후만 따져도 10년간 연락두절 상태이니 생환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는 게 ..

감상글(영화) 20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