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46

고산방학도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 / 이동훈 매화는 늙어야 좋다는데** 어쩌자고, 늙은 매화 줄기 위로 팔소매 넘겨 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게 하는가. 누군 학을 기다린다고 하고 누군 언덕 아래 기척을 기다린다고 하고 이래저래 기다림에 지친 거라면 고갤 쭉 빼거나 먼 데 눈을 주면 될 것을 학의 접은 목처럼 노인의 굽은 등만 유난한 것은 뭔가. 학 울음도 매화 향기도 무성(無聲) 무취(無臭)에 비할 바 아니라 했으니 이 동산은 오감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건가. 매화도 늙고, 학도 늙고, 사람도 그만큼 늙어야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선계라면 늙은 매화와 한통속이 되어야 등 굽은 세상의 진경 그 입구에 서는 거다. 붓 한 자루 바로 세워 박연폭포처럼 내리뻗던 기세를 간직하고 안으로 안으로 인왕산 능선처럼 굽어진 뒤에야..

자작시 2020.02.28

수향산방 전경

수향산방 전경 –수화 김환기의 말 / 이동훈 양식을 빌지 못한 가장 대신 늙은 감나무가 베이고 말았소. 차라리 나를 패서 땔감으로 하지 그랬냐고 말끝에 바늘을 냈더니 굶어 죽든지 얼어 죽든지 하는 판에 생목숨이 나무목숨보다 헐하냐고 향안이 따져 묻는데 그저 나무에게든 누구에게든 미안한 마음뿐이오. 수화 소노인이라고 용준 형이 장난삼아 써준 이름이 내 실질이 되었소. 전쟁 통에 아예 노인이 되어버린 듯하오. 서운하게도, 용준 형의 감나무만은 더 늙지 못하겠구려. 애초에 늙은 감나무 좇아 이사 올 때 태준 형이 선물한 이름이 노시산방인걸 아오. 그런 감나무를 당신에게 물려받으며 수화 양반, 향안 각시 한집 되었다고 수향산방이라 했소. 늙은 감나무 보러 예까지 온 용준 형 명랑한 그림 한 점 장난해 준 걸 기..

자작시 2019.01.25

이인상의 송하관폭도 / 이동훈

이인상의 송하관폭도 / 이동훈 영영 방심(放心) 상태가 되어 버릴 수는 없나?* 왜, 이 구절에서 그림 하나 살처럼 꽂혔을까. 아니, 그림이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문장을 만난 거다. 보라! 이인상의 송하관폭도 이쪽과 저쪽을 가르고 내리치는 물줄기의 파문을. 그 파문이 수직의 부챗살 따라 마구 번져나가는 것을. 저쪽 언덕을 향해 납작 엎드린 소나무는 계곡을 건너게 하는 다리 같기도 하고 이쪽을 막 뜨려는 이무기 같기도 하다. 아슬아슬한 긴장과 넘치는 박력으로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언덕 이편 너럭바위에 앉아 먼 데를 보는 사내는 이인상 자신이었을까. 명문가 집안이라지만 조부에게 서자 꼬리표가 붙으니 일찍 여읜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서자가 되어 실의의 날을 견디며 깊어지고 있었겠다..

자작시 2017.07.07

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 이동훈 오원 십원 하던 만화에 푹 빠진 동무는 제 점방을 털었어. 냄비에 든 동전 몇 닢 그러쥐고 시장 길까지 줄달음질쳤으니 그런 풍경도 꽤나 만화적이었을 거야. 점방 아주머니 병나고 점방 아들 철나면서 만화의 세계를 일찍 졸업한 건 꼽사리 끼던 내겐 몹시 불운한 일이었어. 냄비의 축난 돈을 아는지 모르는지 셈도 없이 라면 끓여주고 아들 대하듯 머리 쓸어주던 아주머닌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점방 문이 닫히고, 점방 아들은 점점 먼 데서 편지를 부쳐왔지. 지방 대학 시절, 계단 밑 지하 창고를 자취방으로 썼어. 안 그래도 곤로의 석유 냄새로 지끈거렸을 머리인데 낮은 천장을 깜빡한 대가로 콘크리트와 그 세기를 겨루었으니 한 발 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머리통을 꾹꾹 눌러대어야..

자작시 2016.12.04

일로연과도

일로연과도(一路連科圖)* / 이동훈 일로연과(一鷺蓮果), 백로 한 마리와 연밥 그림이라. 한 번에 합격하라는 일로연과(一路連科)인 줄 알면 남의 운수를 빌어주는 마음이 기껍기도 하련만 정작, 그린 이는 폐가의 후손 되어 중동 꺾인 연 줄기처럼 후줄근하지 않았겠나. 온몸에 박힌 가시로 저릿저릿했을 생애 가시의 날을 세우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쓴 날들이 마침내 결실하듯 연밥의 표정이 된 날이 있었다. 그 아래 백로가 무연히 지나고 그 지나던 백로가 둘이 되기도 한 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다음을 기약하라는 이로연과(二路連科)의 서운한 말씀일랑 무명화가의 실수로 웃어넘기고 백로의 조신한 걸음새로 그림 밖으로 나가다가 월커덕! 물풀에 다리 잡혀 곤두박질치는 생각이란 一路에, 잘난 맛에 혼자 웃지 말고 二路, 三路..

자작시 2016.04.12

평행봉 고수

평행봉 고수 / 이동훈 밖으로 돌다가 만난 평행봉 고수. 다리 끝으로 차오르는 폼이 국가대표급이다. 집 대표 자격으로 봉 잡고 서너 차례 흔드니 팔다리에 쥐가 논다. 고수는 혀를 찬다. 중요한 것은 기본이고, 기본은 버티기란다. 고수답게 날아서 착지한 것까진 좋았는데 수업료로 담배 한 가치를 빌어서 살짝 김이 샌다. 고수는 철봉으로 떠나고, 평행봉 자리에 걸터앉으니 잠자리가 따라 앉는다. 잠자리 자취 따라 몸을 뒤로 젖히니 하늘구멍이 아찔하다. 가랑이를 양쪽으로 벌린 채 버티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 생의 평행에서 탄력 있게 뜰 것을 기대하지만 주정꾼의 노래만 가깝다. 실업은 취업의 다음 편일 뿐이고, 실망은 기대의 후속 편일 뿐이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것과 버티고 싶은 만큼 버티는 것의 종잇장..

자작시 201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