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닝/ 함기석
소년 모자는 자랑하고 싶었다
엄마가 새로 사준 멋진 모자를 쓰고 외출했다
양파머리 왈순이가 물었다
너 그 휴지통 어디서 훔쳤어?
수족관 앞에서 심술쟁이 고양이가 물었다
너 그 어항 우리 가게에서 훔쳤지?
모자는 어리둥절했다
벤치에 앉아 곰곰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가방을 뒤집어쓴 쟤 좀 봐
새들이 날아와 소리쳤다
그 새장 당장 치워!
소년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모자는 모자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우물보다 깊게 뚫린 수많은 바늘구멍으로
빛과 먼지와 어두운 악기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몸빛이 투명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래 이건 모자가 아닌가 봐 틀림없어
소년은 흐르는 강물에 모자를 띄워보냈다
새로 사준 그 모자 어떡했니?
저녁에 엄마가 다그치며 물었다
소년은 바치춤만 올렸다 내렸다 했다
마당에서 개가 킥킥거렸다
노을 진 하늘에서 새들이 웃고 해님이 웃고
구름 할아버지가 혓바닥으로 콧수염만 쓸고 있었다
- 『뽈랑 공원』 수록
- 함기석의 시는 일반적인 말의 규범에서 많이 비켜 있다. 의도를 가지고 고의로 그럴 텐데 그 과정을 추리하면서 나름의 접점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첫행의 소년과 모자의 설정부터 낯설다. 소년의 모자라든지, 소년과 모자라든지 하는 게 익숙한 문법이나 시인은 ‘소년 모자’를 문장의 주체로 삼는다. 그리고 모자와 소년은 바로 분리되어 이어지는 문장의 주체로 번갈아 등장한다. 머리가 아파서 모자를 띄워 보낸 주체는 소년이고, 어리둥절하다가 모자 안을 들여다본 주체는 모자이다. 모자가 갖는 상징이 있다면 소년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무엇이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난해하거나 감춤이 많은 시는 독자의 상상력에 기대고 읽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위 시의 ‘모자’가 다른 누구와 구별되는 소년만의 정체성이나 자의식으로 읽힌다.
어머니의 기대대로 어떤 상을 가졌다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 바깥의 인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애초에 가졌던 상이나 자아 정체성이 혼란을 겪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전과 다르게 꾸미고 조정해 가는 과정이 튜닝이라면, 내 상상력도 튜닝을 해서 다시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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