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 문숙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긴 시간 네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네
모든 감각을 닫고 먹먹해져야 하는 일이네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네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
- 『기울어짐에 대하여』, 애지, 2012.
* 가을은 홍시의 계절이다. 물렁물렁한 속살, 그 감칠맛에 아이도, 어른도, 짐승도 홍시를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면 저절로 홍시가 되는 줄 알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홍시가 되는 것은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인데, 그 일이 곧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시인은 말한다.
흔히 심지(心地)를 좋게 가지라거나 심지(心志)를 굳게 가지라며, 인간 됨됨이의 요건으로 심지를 말하는데 시인은 그 심지마저 없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너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도 훌륭하지만, 더 지극한 사랑은 자기마저 내어주는 일임을, 전적으로 너에게 기울어지는 이타적인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땡감이 떫은맛을 버리고 홍시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 돌려 말해도 되겠지만, 사람 사이 사랑하고 사는 일은 그것보다 어려운 과제다. 우선, 내 안의 심지부터 고분고분하지 않으니.(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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