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근심의 진화 / 김이하

톰소여와허크 2016. 7. 21. 09:48




근심의 진화 / 김이하

 

나는 알지 못했다

저까짓 세간살이 하나가 커다란 무덤으로 가슴을 누룰 줄

냉장고며 세탁기며 자잘한 물잔 하나까지도

이제는 버리지 못할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지쳐 가는 줄

그렇게 한 풍경이 되어 있는 줄

나는 몰랐다


갑자기 승냥이 ‘응앙응앙’ 우는 산골이 그리워지는 겨울 밤

온몸이 가려워 오는 열화가 잠의 줄기를 걷어 내고

어쩌면 이렇게 멍해지는 생일까 싶어

울음을 누르고

세상의 처음에 선 듯한 쓸쓸함에

겨를도 없이 앉은 밤


내가 어떻게 왔는가

들여다보자니 기억의 거울은 까맣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길 끝처럼 찰나에 풍경을 버리고

까마득하다, 승냥이 울음에 귀만 먹먹하다

그러다 까무룩 죽어가는 삭정이 하나

눈에 밟힌다


지나간 자국을 남기고 돌아오면

낯익은 세간들만 빼곡히 들어선 어느 자리

비듬을 터는 비루한 짐승 하나

엎드려 있다, 눈이 오려나 보다

오고 있나 보다. 이 세상

발자국 없이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 『눈물에 금이 갔다』, 도화, 2016.



   * ‘구운몽’의 양소유는 아름다운 누각에 올라, ‘난쏘공’의 난쟁이는 공장 굴뚝에 올라 지상의 삶을 회의한다. 누릴 거 다 누린 사람도, 하루치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도 이 세상을 뜨고 싶은 유혹이 있는 거다.

   세간살이에 익숙해지는 것과 별개로 세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시인에게도 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열은 오르고, 그 기운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다. ‘응앙응앙’의 주인 백석이 나타샤와의 동행을 꿈꾸며 산골로 가기를 소망했듯이 시인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길”을 회상하며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꿔 보는 것이다.

   불편한 옷을 바꿔 입고 자기 스타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양소유도, 난쟁이도, 백석도, 시인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양소유는 성진으로 깨어나지만 누가 누구의 꿈인지 확실치 않고, 난쟁이 가계는 최저 임금도 못 받는 일용직으로 유전되고 있으며, 백석이 기대대로 나탸샤를 만난 것 같지도 않다.

   시인 역시, “낯익은 세간”을 쉽게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세간에는 함부로 떼기 힘든 관계라든지 삶의 흔적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시인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보다는 고민하고 방황하는 모습에 위로받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할 것이다. 시를 읽고 근심을 던 것 같기도 하고, 근심이 는 것 같기도 하다. “발자국 없이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결구대로 흔적은, 자신이 남기는 거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