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사람이 참 많이 슬플 때가 있다 / 박원혜

톰소여와허크 2018. 7. 21. 23:54





사람이 참 많이 슬플 때가 있다 / 박원혜



이럴 때가 있다

나이 탓일 수도 있고

돈 탓일 수도 있고

그리움 탓일 수도 있고

무언가 슬픔을 겪은 날일 수도 있다

아니, 슬픔이 내 마음 저 깊은 무의식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날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득 시선이 고구마에 간다

방치해 두었던 고구마가 뭔가 내 눈빛을 향하여 애절히 속삭이고 있다

내 몸에 물을 부어 달라는 또는 물컵에 꽂아 달라는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하트 모양의 아주 싱그러운

초록색 잎이 소록소록 튀어 나오고 하얀 뿌리가 물속에 잠겨 든다

오 마이 갓 슬픔이 오간 데 없어진다 환희의 고요만이

살포시 눈가에서 웃음 짓는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도서출판 움, 2018.



  * 박원혜 시인의 시편을 읽으며 슬플 때 처방 두 가지를 배운다. 하나는 시 제목 그대로 「속상한 마음 가라앉히러 서점에 갑니다」다. 그러면 서점에서 “저녁밥 짓는 고운 연기”를 볼 수 있단다. 책 냄새가 밥 냄새처럼 후각을 편안하게 할 것도 같고, 책의 내용이 마음을 위로하기도 할 것이다. 예상치 않게 표지나 삽화 한 장면이 재미나거나 엉뚱해서 슬픔으로 인한 누수를 잠그는 효과도 기대해봄 직하다.

나이 탓, 돈 탓, 그리움 탓 그 밖의 어느 탓으로든 슬픔이 작동하니 매번 서점 가는 것으로 모든 슬픔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시인은 물컵에 고구마 키우는 방법을 제안한다. 사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관건이다. 고구마를 위해 물컵을 대고 물을 준 사소한 노동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고구마는 초록색 잎을 내고 인사를 한다. 가망 없는 생명이 자신의 작은 성의로 말미암아 생명을 틔우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니 보람이 적지 않다. 슬픔이란 게 남의 탓으로 오더라도 제 탓을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성정이기도 할 텐데 스스로를 긍정하는 마음이 있으니 슬픔도 안으로 세게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주춤할 게 분명하다. 고구마 하나에 미치는 따스한 눈길이 공동체에 스미면 지구 전체 슬픔의 총량도 줄어들 거란 생각도 해본다.

슬픔은 오는 길이 따로 없으니 언제 어떻게 마주할지 모른다. 그 슬픔을 피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슬픔을 덜어가려는 자세는 소중해 보인다. 근처 책방에 가면,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처방을 발견하고 “오 마이 갓” 대신 “오 내 모자” 할지 모른다. 용서하시라.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릇 / 박연준  (0) 2018.08.04
책장을 정리하며 / 임영석  (0) 2018.07.30
가리봉동 오후 4시 / 김선  (0) 2018.07.18
서경별곡 / 정희성  (0) 2018.07.10
어떤 연민 / 이태수  (0) 2018.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