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잃어버리다 / 사윤수
하늘을 조금씩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준 것이 지붕이다
술 취하여 농기구를 집어 들고치는 아버지를 피해 한바탕 맨발로 동네를 돌아오면 시린 발끝에 달빛을 끌어당겨 덮어 자곤 했다 명지바람 발밤발밤 지붕 위를 거니는 소리 툭, 투둑, 투두둑, 자드락비 맨 먼저 떨어지는 소리 감또개 뚝! 또그르르 굴러 내리는 소리 그 우주의 초침 소리가 나를 키웠다
사람들은 지붕을 걷어냈다
지붕 위에 집을 짓고 또 지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떠다니는
욕망의 층수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가슴에 비가 샌다거나 무엇을 찾아 헤매는 이들은 지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물탱크, 녹슨 에어컨 외기, 손바닥 만한 남새밭을 이고 서 있는 집들
고층 건물 꼭대기엔 불면의 안테나 어지럽게 솟아있다
할아버지를 내가 본 적 없듯이
아버지에겐 일찍부터 지붕이 없었던 것을
머위 잎 푸른 기억의 툇마루에 앉아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는 낙숫물 소리 듣는다
처마 밑에 일가를 이룬 제비 식구 촉촉한 새끼들
새롱새롱 감꽃 같은 입을 벌리며 오졸거린다
푸른 물소리 아득히 번져간다
- 『파온』, 최측의농간, 2019 (‘시산맥사, 2012’ 복간본)
감상- 식구 많은 흥보의 집은 바람벽만 있고 지붕이 아예 없는 걸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붕도 못 이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얘기겠지만 하늘의 별을 들였으니 낭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아파트나 고층 건물도 천장만 있고 지붕이 없다고 볼 수 있겠는데, 별 볼 일 있는 낭만은 줄어들고 층간소음으로 인한 시비는 늘었다. 옥상에서 스티로폼 농사를 짓는 몇몇 주민은 그걸로 위안을 삼기도 하겠지만 다수의 주민은 “지붕을 잃어버린”, 가슴에 비가 새는 사람들이다.
‘지붕’에 대한 시인의 정의는 남다르다. 지붕은 “하늘을 조금씩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준 것”이란다. 집집이 공평하게 내려앉은 하늘 한 쪽을 두고 식구를 건사해야 할 가장의 존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지붕은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화음을 내기도 하지만 더러 불협화음으로 시끌시끌할 때도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시인이 돌아보는 지붕은 “푸른 물소리”로 기억된다.
욕망의 층수를 쌓아 올리면서 잃어버린 지붕도 있지만 시인의 지붕이 되어주었던 아버지가 당신의 지붕인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어쩔 수 없는 아픔도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에 이고 있는 지붕은 조금씩 낡아가고 비가 새기도 하고 누군가의 가슴을 적시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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