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 배영옥
찌그러진 주전자를 옆에 두고 한 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다
반나절이 다 익어가도록 흐느끼고 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낮게 스쳐간다
발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다가
젖은 눈물자국이 말라가는 한낮의 아이
오랫동안 내 속에서 죽은 아이
지금도 포도나무를 보면 되살아나서
자전거 바퀴를 한 발로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포도만 알알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2019.
감상 – 대개의 시는 말을 아낀다. 말을 아끼면서 진의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비유나 상징을 활용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땐 애초의 뜻은 사라지고 수사만 남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생긴다. 물론, 말을 다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진술이 불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머릿속에 더 많은 잔상을 남기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가 있다. 개인적으론 이야기 형태를 띠면서도 말을 아껴서 상상을 더해 읽게 하는 시에 끌리는 편이다.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도 그런 시다.
주전자 꼭지를 헝겊으로 틀어막고 자전거에 싣고 흔들흔들 오다가 논두렁에 엎어지기라도 한 걸까, 저 아이는. 찌그러진 주전자에서 쏟아진 것은 잘 익은 막걸리였을까. 가족이 기다리는 감주였을까. 상심한 아이는 단내 맡은 개미를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불안한 감정을 노출시킨다.
때마침 낮게 날아가는 비행기는 뭔가. 포도나무 집에 아이를 맡긴 부모가 혹여, 저 비행기를 탄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바퀴를 한 발로 돌리는 건 또 뭔가. 다른 한 발은 다쳐서 그런 건가. 아니면, 슬픔으로 너무 기울어 균형을 맞출 수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아이가 겪은 그날의 일들은 포도나무는 지켜봤을 것이되 시인은 거꾸로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라고 말한다. 자신 아니고는 그 상실과 낙담과 슬픔을 다 알아줄 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보랏빛으로 물든 포도송이만 아이의 상처와 슬픔을 대신하고 있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포도 알알이 익어가듯 다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오래된 상실감을 꺼내 보게 될 거 같다. 시인이 말하지 못한 부분을 독자가 제 경험치를 가지고 이야기하고픈 시, 그런 시가 눈앞에 있지만 시인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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