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연습 / 최승자

톰소여와허크 2021. 9. 7. 21:11

연습 / 최승자

 

 

한잠 자고 일어나 보면

당신은 먼 태양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 얼마 뒤, 불편한 안개 뒤편으로

당신은 어 엉거주춤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낯설게,

시체 나라의 태양처럼 차갑게.

나는 그 낯설고 차가운 열기에

온몸을 찔리며 포복한 채

당신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거북스런 안개가 걷히고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우리의 사랑도 속수무책 거미줄만 깊어 가고,

또 다른 해가 차가운 구덩이에 처박힌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감상 삶은 한 번뿐인가? 그렇다, 아니다 한 쪽으로 쏠릴 수는 있어도 어느 한 쪽이 배제된 적은 없다. 어쩌면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삶, 그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뜻대로 이룬다면 큰 불만이나 큰 갈등을 덜어내고 살 텐데 스스로는커녕 조물주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긴 하다.

한 번이든 몇 번이든 삶은 관계 맺는 일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 기쁘고 들뜨기도 하지만 슬프고 실망스런 일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더러 가장 좋았던 한 순간이 가장 낭패스런 일로 기억되고, 그 감정을 수습하지 못해 한동안 아니면 평생을 힘들어하기도 한다. 최승자 시인에겐 당신이 그런 사고를 치고 마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이쪽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진실하지 않다. 이쪽의 마음과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쪽도 그걸 분명 깨닫고 있지만 그것도 사랑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데 존재의 비극이 있다. 그나마 당신 탓을 분명히 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기록하는 건 시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몹쓸 당신을 이쪽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삼자의 시선일 뿐 정작 당사자는 더 나은 관계와 삶을 위해 연습할 뿐이다. 사방이 거미줄투성이라도 그 사이를 헤집고 고개를 내미는 연습이 마냥 쓸쓸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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