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장석주
흑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다.
어둑했다.
젊은 이장이 흑염소 떼 끌어가는 걸
깜빡했나 보다.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 찬 슬픔으로 앞이 캄캄하다.
저기 먼 곳이 있다.
먼 곳이 있으므로 캄캄한 밤에
혼자 찬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몽해항로』수록
- 여드레 가는 비가 설밑까지 이어지는 섣달그믐에 장석주의 <그믐>을 읽는다.
그믐이라서 여느 때보다 어둠이 일찍 와서 깊어지고 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젊은 이장은 몹쓸 짓을 하고 있다. 주인이 데려가지 않는 흑염소 떼는 풀을 뜯기는 하지만 몹시 불안해 보인다. 어둠과 흑염소가 분간이 안될 때 새된 비명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분위기이다.
화자는 스스로 그믐이라고 말한다. 왜, 흑염소 중 한 마리가 아니고 그믐일까. 화자는 스스로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좀처럼 빛이 되지 못하는 가운데 좀 더 근원적인 슬픔, 그 슬픔에서 비롯된 어둠에 자신이 옭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슬픔에 마냥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캄캄’하지만 ‘저기 먼 곳’에 대한 지향이 있기에 지금이 견딜 만한 삶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슬픔에 직면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누구나 자기가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슬픔이 있게 마련이니……. 그믐 같은 슬픔, 찬밥 한 덩이의 슬픔이 지나면 환한 보름, 따뜻한 밥 한 공기도 선물처럼 있을 것이다.
섣달그믐이 새해로 이어지는 오늘 하루, 어둠이 땅에 스미듯 슬픔 또한 편안하게 누일 수 있기를 빈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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