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곳으로 가고 싶다/ 양문규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09:48

그곳으로 가고 싶다/ 양문규


그곳으로 가고 싶다

추수가 끝난 마른 옥수수밭 뒤로

그녀는 개울 건너 메밀꽃 피는 밭둑 걷고 있을 것이다

산과 들에는

쑥부쟁이 구절초 왕고들빼기 참취 고마리 쇠무릎

금강아지풀 개미취 물봉선화 산비장이 여뀌

굽이굽이 강물 흐르듯 두마 지나 벌곡

대둔산 태고사 저수지 멀리 금산이나 운주까지

귀뚜리미 울음 속으로 꽃들이 환하게 핀

들길 그녀는 가고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사방연속꽃무늬

물소리 찰찰 넘치는

물 속 나라보다 깨끗한 세상 없을 거라며

내게 나지막이 귀엣말 주고

수줍은 듯 물 위 미끄러져 아주 멀리 사라져간 여자

파아란 하늘 꽃살문 너머

세상 어디에선가 별밭 일구고 있을 것이다

가을 깊으면 천태산 너머 흑석리

개울 건너 붉은 수수밭 아래

메밀꽃 얼기설기 햇빛 좇아 하얗게 피어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 『집으로 가는 길』수록


-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본 장면을 말하고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다. 정작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이나 그를 따르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는 혹시, 안견의 의지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안평대군이 생각하는 이상향과 안견이 생각하는 이상향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이 있게 마련이다. 이상적인 제도를 꿈꾸기도 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바라기도 하고, 그 안에 이상적인 자기의 자세를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상향은 몹시 바라면서도 쉽게 주어지지 않던 것들로 그곳을 채우게 될 것으로 짐작이 된다. 더러 고수들은 평범한 삶 자체가 이상향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위 시를 노래한 시인도 고수 반열에 들려나 보다. 메밀꽃을 시작해서 온갖 꽃으로 이어진 길은 시골의 일상 풍경이기도 하니까.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먹고 싸고 자는 일처럼 일상일 테니. 그럼에도 위 시의 자연은 실제 자연보다 조금은 이상화된 듯도 싶다. 산과 산 사이 길이 지나고, 물길이 지나고, 하늘길이 지나는데 한결같이 사방연속꽃무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까닭이다.

  화자가 좇는 ‘그녀’도 현실의 구체적인 여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조금은 신비화된, 예컨대 대지의 여신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녀와의 관계도, 그녀의 행방도 궁금증을 자아내며 여운을 준다.

  시인이 노래하는 그곳은 도시의 이곳과는 사뭇 다르다. 생계를 잇기 위한 농촌의 삶과도 구별이 된다.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먼 이상향을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어쩌면 선택을 통해서 가 닿을 수 있는 지점에, 약간의 환상을 덧대서 노래한 것이리라. 안견이 ‘그곳’에 사람을 지운 것처럼 시인은 ‘그곳’에 ‘그녀’를 두고 싶었을 것이고.(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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