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만중(1637∼1692)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57

김만중(1637∼1692)

 

서포(西浦)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다. 태어나기 한 달 전에 그의 아버지(김익겸)가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남한산성이 적에 의해 함락되자 그들에게 붙잡혀 부끄러움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남문 위 화약고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고 말았다. 당시 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용케 배 한 척을 얻어, 맏아들 만기(딸이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가 됨)와 뱃속의 만중을 품은 채 외가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637년에 김만중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윤씨(영의정 윤두수의 가계)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친정의 생활도 어려워져 베짜고 수놓는 것으로 살아나갔으나 학업에 방해 될까봐 그 모습을 두 아들에게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고, 곡식을 팔아 책을 사서 공부시키거나 혹은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다.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린 다음 손수 베껴서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엄격했지만 자애로웠으며 서포의 일생에 교육면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한 그는 《윤씨행장》에서 "어머니가 책을 좋아하므로 옛날 기이한 책들을 모으고 또 패설작품들까지 얻어와서 밤낮 틈만 나면 들려주시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고 기술하고 있다.

 서포가 태어났을 때는 당쟁이 극심했는데, 가계가 모두 서인당의 중심적 인물들로서 남인당과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28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이후 대사간.도승지.대제학.대사헌.의금부판사까지 요직을 두루 역임하지만, 1687년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선천에 유배가게 되었으며, 1689년에는 '기사환국'(숙종이 왕비 민씨를 내쫓고 궁녀였던 장소의를 왕비로 명한 사건)과 관련하여 직언 했다가 또다시 남해로 유배가게 된다.  이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죽음을 당하고, 김만중은 남해 외딴 섬 노도에 위리 안치를 당했다. 위리 안치란 유배지의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놓은 것을 말한다. 김만중의 자손들마저 제주.거제로 유배가게 되었고 어머니 윤씨부인은 시름 속에 그 해 겨울 사망한다. 효성이 남달랐던 서포였지만 유배지의 병상에서 장례마저 못 치르고 통곡하다가 4년 뒤인 56세로 일생을 마친다.  

 김만중은 "아이들이 나관중의《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삼국지》나 사마광의 《통감》을 보고는 울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통속소설을 쓰는 까닭이다." 라고 하면서 소설을 옹호했으며, 이러한 그의 생각은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란 소설 창작으로 이어졌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선천에 유배가 있으면서, 자기 어머니(윤씨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자,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드리고 소일거리를 삼게 하기 위하여 '일체의 부귀번화가 모조리 몽환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쓴 것이다.

 《사씨남정기》역시 남해 노도에 유배간 김만중이 인현왕후를 내친 숙종의 마음을 돌리고, 유배가 풀리는 날 어머니께 읽어 드리겠다는 지극한 사모의 정으로 많은 밤을 새워 썼다고 한다.

 김만중은 또한 《서포만필》에서  "우리말이 아닌 다른 나라의 말로 시문을 지었다면 비록 제 아무리 뛰어나고 유식한 자(學士大夫)의 시부(詩賦)라 해도, 나무하는 아이와 물긷는 아낙네(樵童汲婦)의 흥얼거림만 못하다" 면서 국문시가를 극찬했는데 이는 우리의 성정(性情)이 담긴 우리 문학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선각자로서의 모습이었다. 또 우리 말과 글로 씌어진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조화의 미묘함이 저절로 드러나 소위 비속함이 전혀 없다." 라고 높이 평가한 것은 "우리 나라 가곡은 음탕한 것이 많아 이렇다 하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우리 나라의 국문시가를 천시한 이황(李滉)과 같은 보수적인 문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독자적인 문학관은 그의 국문본.한문본의 소설이 계층의 구별 없이 만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되었고, 박지원의 순정문학파(醇正古文派)에 대한 반발이나 정약용의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조선의 시를 쓴다." 와 같이 실학자들의 문학관에까지 계승되었다.

 다음은 김만중의 효에 대한 일화이다.

[ 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증조부가 영의정, 할아버지가 선조의 사위인 부마를 지낸 훌륭한 가문의 무남 독녀였다. 만중 형제가 어렸을 때 그들의 스승은 곧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소학, 당시 같은 책을 손수 베껴 아들들을 가르쳤다. 이조 참판을 지낸 친정 아버지도 세상을 뜨고 남편도 없었기 때문에 윤씨가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그래서 만중의 어머니는 눈만 뜨면 베틀에 매달려 명주를 짜 그것을 내다 팔아 근근이 자식들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년 만중의 집에 별난 도부 장수가 찾아왔다. 그는 흔히 보는 질그릇이나 놋수저를 파는 행상이 아니라, 책을 팔러 다니는 도부 장수였다.

 제법 글을 익힌 만중은 그 도부 장수가 펴보이는 책 중에, 옛날 중국의 '춘추'라는 책을 해설한 '좌씨전'이라는 책이 탐이 났다. 그러나 어머니가 베를 짜 어렵게 살아가는 형편에, 그런 값나가는 책을 사달라고 철없이 어머니를 괴롭힐 수는 없었다. 만중은 예의 '좌씨전'을 몇 장 들추어보다 말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좌씨전이라고 해서 대단한 책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군."

 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마루 저쪽에서 만중 형제가 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고 있던 어머니 윤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들 곁으로 왔다.

 "뭐가 별 거 아니라는 거냐?"

 "사람들이 좌씨전, 좌씨전 하기에 어떤 책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소문만 못하네요."

 그러자 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아들을 쏘아보았다.

 "네가 어찌 그 귀한 책을 하찮게 여기느냐. 내가 그토록 지성으로 네게 글을 가르쳤다마는, 아직껏 향내나는 책과 구린내나는 책을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냐?"

 만중은 난처하여 뭐라고 변명도 못하고 쩔쩔 매고 있는데, 눈치 빠른 도부 장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마님. 도련님이 말은 그렇게 해도 눈빛은 몹시 탐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도부 장수의 말에 윤씨는 더욱 파리한 얼굴을 하며,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 헛말을 했다는 거 아니냐."

 하고는 도부 장수를 쳐다보았다.

 "이 책, 내게 파시지요."

 "값만 맞는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좀 귀한 거라 무명 반 필은 주셔야 됩니다."

 행상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씨는 베틀로 가더니 짜고 있던 무병 반 필을 싹둑잘라 책장수에게 내주었다. 도부 장수가 돌아가자, 윤씨는 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집어들더니 만중을 불렀다.

 "어서 종아리를 걷어라. 이 어미의 낙이 너희들 공부하는 모습 구경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구하기 힘든 책을 보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만중은 어머니의 모습이 워낙 파랗게 질려 있어서 잠자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만중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결코 매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베틀 하나로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갖고 싶은 책을 보고도 딴 말을 한 자신의 속마음을 몰라주는 어머니가 야속한 것이었다. 만중은 마침내 엉엉 소리내어 울며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 실은…"

 그러자 윤씨는 울고 있는 만중을 외면한 채 쌀쌀하게 말했다.

 "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 어미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말을 귀담아 듣거라. 이 어미는 비록 끼니가 없더라도 네 형제가 읽어야 할 책은 한 권도 놓치지 않을 테다. 그러므로 이 어미의 고생을 덜어줄 생각으로 아까 같은 허튼 말을 하기 보다는, 이 어미의 허리가 휘도록 '이 책을 보고 싶습니다.' , '저 책을 보고 싶습니다.' 하는 게 효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라."

 여기서 만중은 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 어머니는 내 속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구나. 어머니는 얕은 효성보다는 깊은 효성, 비록 당장은 어머니를 힘들게 해도 나중에 빛나는 그런 굵고 의미 있는 효성을 바라시는구나.'

 만중은 회초리를 거두시는 어머니의 눈에도 축축한 물기가 고여 있음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울었다.

 서포 김 만중의 효성이 어떠했냐 하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외로운 어머니의 얼굴에 늘 그늘이 드리워 있는 것이 안타까워,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고 우스갯소리, 우스갯짓을 곧잘 했다고 한다.

 윤씨는 어떤 일에도 웃음을 보이는 법이 없었는데, 웬일인지 만중이 우스꽝스럽게 굴면, 그땐 어김없이 배를 쥐고 웃었다고 한다. 어쩌면 만중이 나중에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을 쓰게 된 숨은 소질이 이때 싹텄는지도 모른다.

 '북헌집'은 김만중의 맏손자 김춘택이 쓴 것으로, 거기에 만중의 효성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내 일찍이 선생(김만중)이 어머니(윤씨)모시는 광경을 본 적이 있거늘, 어리광을 떠는 것이 흡사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달라는 어린애와 같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얼굴에 미소가 솟도록 하기 위해 선생은 별의별 우스꽝스러운 짓을 다 하셔서, 당시 어릴 때인 나(김춘택)로서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선생은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것을 평생의 아픈 일로 여겨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성을 바쳤는데,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 앞에서 삐악거리며 노는 것과 같았다.

 조선 숙종, 경종, 영종 때의 학자이며 나중에 '단종 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 재가 쓴 '삼관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인 (만중의 어머니 윤씨)은 옛날 역사나 별난 사실을 적은 책을 몹시 즐겨 읽거나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서포(김만중)는 많은 이야기 책을 모아서 그것을 읽어 드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서포는 젊어서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나라의 일이 아니고서는 한 번도 어머니 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벼슬을 그만 두면 이른 아침에 어머니께 문안 인사드리러 가서는 저녁이 되어 자리에 드셔야 돌아오곤 했다.

 숙종 때 김수항 영의정을 물러나게 한 일이 부당하다는 상소문을 내었다가 왕의 분노를 사 남해 외딴 섬으로 귀양가던 중, 영남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다음의 시는 그의 효성이 얼마나 짙은가를 말해준다.

 

어머니 생신날이 돌아올 때마다

형제가 색동옷 입고 춤을 추었건만,

이제 그 중 한 형제가 명 받들어

외로운 어머니 곁을 떠났으니

어머니 마음 얼마나 쓸쓸하실까?

 

 이토록 애틋한 효성을 지닌 김 만중이건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인들 오죽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