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1920-2004, 경남 통영)
아래의 글은 김상옥 시인을 인텨뷰한 내용과 감상을 적은 윤정구의 글입니다.
[지금 읽어도 그만한 명품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백자부(白磁賦)」와 「옥저(玉笛)」, 그리고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등 그야말로 고전의 품격을 지닌 주옥같은 작품들을 배우면서 중·고등학교 교육을 마쳤던 나에게, 뒤늦게나마 팔순의 시인을 직접 뵙고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사실 보통의 감격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선생의 시 「봉선화」를 교과서에서 만나고 암송하면서 매료되었던 어린 날의 감격과도 닮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붉은 댕기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땋아내린 나의 셋째누님은 봉숭아꽃과 잎새에 백반을 함께 넣어 빻아 작은 내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었다.
누님은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 시집을 갔고, 누님을 그리는 정이 남달랐던 까닭으로 「봉선화」에 담긴 애틋한 그리움이 어린 내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지금은 환갑을 넘긴 누님에 대한 추억은 그대로 ‘봉선화’의 한 장면으로 환치되었던 것이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 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봉선화」 전문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게는 선생의 강의를 한번 들은 일이 있다. 십오 년 전쯤 혜화동에 있는 시도서관에서 매주 토요일 다섯 시에 문학강의를 열었는데, 나는 거의 토요일마다 거르지 않는 모범 학생이었고, 그 중의 어느 날 밤 초대받은 선생께서 시와 함께 백자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하셨던 것이다. 그 때 강의 내용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에게 팔릴 뻔한 투각백자필통을 십만 원짜리 전세집에 사시면서 변두리 집 한 채 값인 칠만오천 원에 사 들였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만은 잊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돈이 남아 돈이 될 것 같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한번 보고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간절함, 바로 그것이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시를 쓰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고. 적당히 이름을 얻고 재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간절함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초정 선생의 시에 임하는 간절한 자세는 십 년 전에 발간한 칠순기념시집 『향기 남은 가을』에 붙인 선생의 자서에서도 확인된다.
"…세상의 詩는 넘치도록 흔한데, 詩는 정작 드물었다. 나는 그 동안 이를 위해 우황(牛黃)든 소처럼 앓아왔다. 그러나 거둔 것은 결국 쭉정이뿐이다. 이중에 한 편이라도, 아니 한 구절이라도 후일에 남을 수만 있다면 참으로 분외(分外)의 보람이겠다."
서투른 주석을 삼가고 시인의 시와 행적을 좇아 따라가며 살펴보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 초정 선생은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적 자각이 움트던 삼일운동 다음해인 1920년, 삼도수군통제사가 있던 남해안의 중심 항구인 통영에서 갓일을 하시던 아버지 기호(箕湖) 김덕홍(金德洪)옹과 어머니 여양(驪陽) 진(陳)씨 사이에서 6녀1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오십이 넘었으므로 집에서는 숫제 왕이었어.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기꺼이 신하가 되어 주셨지.” 고집이 세고 영특한 왕으로 자랐다지만, 남달리 꿈과 인정이 많았던 것을 박경리 선생의 시집 『자유』에 실린 ‘닭’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선생과 잠시 가까웠던 이중섭의 그림과도 같은 분위기이다.
"…/ 아아 생각이 난다/ 동향의 金相沃 시인이/ 상처난 닭을 안고 울며/ 창근이 약국에 뛰어 갔었다는/ 어릴 적 그의 얘기가 // 바둑을 두던 창근이 의원은/ 그까짓 솥에 앉혀라/ 하는 바둑 친구 말 들은 척 않고/ 이것 저것 의서 뒤지다가/ 바지락 껍질 빻아 바르라고 // 닭을 벗삼은 시인의 마음과/ 눈물 콧물 범벅이 됐을 소년 보고/ 처방 일러준 따뜻한 선비의 마음/ 육이오 때 멸치 부대 쓰고/ 바다에 던져졌다던 창근이 의원/ 끝없는 눈발/ 이 풍진 세상도 잠시 잠들고/… ―박경리 선생의 시 「닭」 부분
“여섯 살이 되자 유치원 대신 동네에 있는 한문서당 송호재(松湖齋)에 다니면서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소학(小學) 등을 배웠지.”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는 덕분으로 책을 덮고 암송하거나, 뜻을 풀이하고, 글씨를 잘 써서, 나이 많은 어른들을 젖히고 ‘괴(魁)’를 받아오곤 하여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통영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니 두 살 위인 윤이상(尹伊桑)이 한 학년 위였고, 두 살 아래인 김춘수(金春洙)가 두 학년 아래였다고 하니, 당시 통영이 일찍 개화된 편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통영으로서는 큰 축복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유치환, 유치진과 함께 박경리에까지 이르면 확실히 통영은 근대 문화를 여는 남쪽의 큰 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하겠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방면에 재능을 보였으므로 특별히 글짓기에만 뛰어났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에는 14세에 지었다는 「연필」이 실려 있어 어린 날의 재주를 보여주고 있다.
"새빨간 연필/ 필통 안에서/ 숨소리도 없이/ 잠이 들었네./ 한나절 글씨 쓰던/ 꿈을 꾸면서. // 머리에 다 낡은/ 은모자 쓰고,/ 몸에는 살이 나온/ 헌 옷을 입고,/ 작은 칼 옆에서/ 의좋게 자네. //"
육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한재현(韓在鉉)의 격려와 글씨에 뛰어났던 이찬근(李瓚根), 묵죽에 빼어났던 김지옥(金址沃)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영화, 연극, 무용에 일가를 이루었던 노제(蘆堤) 장춘식(張春植)의 영향도 젊은 날의 문학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 형이었던 장노제 선배와 함께 최초의 토키영화 「사막의 화원」이나 「길」 「나의 청춘 마리안」 「마음의 행로」 등을 본 것은 지금 회상하여도 아름다운 기억이야.”
한때는 <남원서점(南苑書店)>이란 책방을 경영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서 「임꺽정전」도 팔고, 독립운동의 아픔과 애절함을 노래한 낭산(浪山)의 한시를 써붙였다가 영창에 가기도 한다.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된 식민치하에서 독학으로 한글 시작(詩作)을 계속하느라 무려 네 번의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1937년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창간한 시동인지 『맥(貊)』―맥은 말하자면 꿈을 먹고 사는 상상의 동물로서, 예술하는 사람을 가리켜 맥족(貊族)이라 칭하기도 한다―에는 후일 임화, 윤곤강, 서정주, 박남수 등이 합류하여 우리 시사(詩史)에 있어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당시로서는 글 쓰는 시인은 다 동지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지.” 시인이 갇혀 있는 감옥 앞에 와서 울다 시집간 넷째누님 김부금(金富今)을 찾아 지금은 낯선 이름이 되어버린 함경북도 서수라―러시아쪽 국경에 있는 도시로서 강 건너 러시아쪽의 불빛이 그렇게 처량했다고 한다― 웅기, 아오지, 청진 등지를 유랑하면서도 계속 시작에 몰두하였고, 다음 해인 1938년 『문장(文章)』지에 「봉선화」를 발표함으로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다음해에는 동아일보 신춘시에 「낙엽」이 당선되고, 해방되던 해 2월에는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윤이상과 함께 상경한다.
“동아일보에 시조로 함께 등단했던 이호우의 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인장가게에서 도장을 파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이호연, 오세창 선생 등을 뵈었지.”
전부터 그의 시재를 알아보고 큰 칭찬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한국 시조계의 대부 가람 이병기(李秉岐)는 해방이 되어 군정청(軍政廳)의 교과서 편수관이 되자 「봉선화」를 국어교과서에 싣는다. 재미있는 것은 그 해 가을에 전국 효시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해방기념제전(解放記念祭典)’이라는 이름으로 글짓기대회가 열렸는데, 이주홍, 김정한, 김수돈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내려갔던 젊은 초정 선생이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직접 선수로 시부(詩部)에 출전했던 일이다. “마치 과거(科擧)를 치루듯, 날마다 다른 시제(詩題)가 걸렸는데, 사흘 동안 내가 내리 장원을 하였어.” 이것은 작은 삽화에 불과하지만, 선생의 출중한 시재(詩才)와 자신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삼천포에 내려가 삼천포중학교의 교사를 시작으로 통영중학교, 통영여고, 마산고, 경남여고 등에서 20년 가까이 교편을 잡는다. 삼천포중학교에서 박재삼, 마산고에서 이제하, 경남여고에서 허윤정 등을 길러냈다.
1947년 시인은 첫시집 『초적(草笛)』을 발간한다.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의 전과정을 내 혼자 힘으로 해냈지.” 시인이 직접 닥종이를 고르고 우아한 활자체로 인쇄한 『초적』 원본은 지금도 고서점에서 가장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우리 책의 하나이다. 거기에는 물론 우리들이 오늘날까지 애송하는 「백자부」와 「청자부」 「십일면관음」「봉선화」 「추천」 「집오리」 「옥저」 「다보탑」 등의 보물이 몽땅 실려 있으니 비쌀 수밖에 없다 하겠으나, 선생이 직접 하소기체(何紹基體)로 제자를 써서 표지를 만드는 등 그 공들인 장정의 몫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겠다. 김동리 선생은 「초적(草笛)의 악보(樂譜), 김상옥 씨의 시조집을 읽고」라는 제목으로 축하의 글을 써서, 『민중일보』에 6단으로 실었다.
" 형식을 비록 시조에서 빌렸으되 시조의 낡은 틀에 구애됨이 없고, 이름을 비록 ‘풀피리’라 붙였으되 풀피리처럼 갸냘프지도 않다."
조지훈(芝薰) 선생은 다음해인 1948년 ‘작년에 나온 모든 책들 중에서 내게 두 권을 고르라면 나는 망서리지 않고 양주동의 ‘고가연구(古歌硏究)’와 김상옥의 ‘초적’을 꼽겠다.’고 일간지에 공표하였다 하니, 처음으로 시집을 펴낸 선생으로서는 실로 예기치 못한 반응이었다. “모두 고마운 말씀들이었지. 까마득한 시골 서생이 황송할 정도였어.”
초정 선생이 향리에 다시 돌아와서 한 첫번째 일은 남망산에 충무공의 시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비문에 새긴 충무공 예찬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바, 중앙일보를 비롯한 일간지에서 통영을 소개할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구절로서 ‘한민족(韓民族)의 윤리를 일컬어 진실로 한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나니, 이로써 충무공은 비로소 그 진리 앞에 성인(成仁)한 교주(敎主)시니라’는 것으로서, 노산(鷺山)은 이를 일러 ‘서애의 징비록에도 없는 말이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교사라는 평범한 생활을 계속한 것이 아니라, 인쇄소 직공에서, 서점, 도장포를 내기도 하며, 안해 본 고생이 거의 없다는 초정 선생은, 62년 상경하여 견지동에서 표구사를 겸한 골동품가게 ‘아자방(亞字房)’을 내어 십여 년간 경영하며 숫제 백자 곁에 들어가 산다. 범보(凡父) 선생의 신라사(新羅史) 강론을 경청하기도 하고, 옛 고서들을 가까이하면서 백자에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론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국립박물관 초청으로 백자에 대한 사랑과 예술정신을 강의한 것을 읽으면 정말 그렇게 명징하고 시원할 수가 없다. 한편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에도 독학 정진하여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에게는 보아서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만들 수 있는 선험적이고 본능적인 미의식의 능력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서울을 비롯, 부산, 대구, 대전, 마산, 진주 등지에서 그림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72년에는 쿄토(京都)의 융채당(隆彩堂)화랑에까지 초청을 받아 일주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첫시집 『초적』을 상재한 이듬해에 시집 『고원(故園)의 곡(曲)』을 펴내고 다시 그 다음해에는 시집 『이단(異端)의 시(詩)』를 출간하고, 52년에는 동시집 『석류꽃』을, 53년에는 시집 『의상(衣裳)』, 56년에는 시집 『목석(木石)의 노래』, 58년에는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 73년 삼행시집 『삼행시집(三行詩集)』, 75년 산문집 『시(詩)와 도자(陶磁)』, 80년 시집 『먹(墨)을 갈다가』, 89년 시집 『향기 남은 가을』, 98년 시집 『느티나무의 말』을 출간하였으며, 제1회 중앙일보시조대상, 제1회 노산(鷺山)문학상, 제2회 충무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주는 문화훈장을 소문없이 거절했던 것도 연전에 황순원 선생이 문화훈장을 거절하면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일이다. “시인에게 훈장이 무슨 당치않은 훈장인가? 시인에게는 제대로 읽어주는 한 사람의 독자가 더 중요하지.”
오래 전 일이지만 김학렬(金鶴烈) 부총리가 서거하자 그의 비서실에서 비문을 부탁하였는데, 정중하지 않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천만원을 주지 않으면 쓰지 않겠다고 고집하였던 일도 선생의 반골 기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나라의 천재 시인 강보(康父)가 글 한 편에 황금 30근을 받았다고 되어 있거든. 내가 강보보다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좇아온 비서실장도 만만치가 않았다. ‘강보하고 같은 것은 상쇄하여 주시고, 더 나은 만큼만 받고 써 주십시오’ 하여 웃고 써 주었는데, 그 때 선생이 써준 영수증은 10만원을 받고 천만원짜리 영수증을 발행하였으니, 아마 동서고금에 그런 기문(奇文)이 다시 없을 것이었다.
후배 시인들을 위한 한 말씀을 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따끔한 두 문장이다. “절차탁마(切嗟琢磨)해야 돼. 자기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앞으로 남은 계획이 있다면 하고 말끝을 흐리자, 역시 명쾌하다. “곧 팔순기념 전집이 나올 것이고, 그림도 남화, 북화 다 섭렵하고, 글씨도 모든 체를 다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고, 전각도 죽는 날까지 다듬고 배우다가 갈 거야.” 팔순 청년다운 말씀이다.
정현종은 이 점을 이렇게 갈파했다. "전통적 정서나 시인의 인식, 통찰 및 감각이 시대가 흐르거나,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힘과 광채 혹은 절실함이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의 시는 立證하고 있다."
서정주는 아래와 같이 시인을 칭송했다. "그는 모든 事物을 볼 때마다 거기 살다가 죽어간 옛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우리 詩人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이다."
선생의 말씀대로 민족의 수난과 슬픔을 껴안고 어루어서 형상화에 성공한 백자를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시를 지어 바치고, 그에 모자라는 것은 그림으로 그려 받들고, 또 돌에 새기어 세세에 전하고 싶은 것이 진정한 예술로 꽃피우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예술가에게 사랑은 위대한 것인지 모른다고.
읽을수록 고전은 맛이 새롭다. 읽고, 또 읽어도 ‘백자부’는 다시 새롭다.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 드높은 부연 끝에 風磬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 갸우숙 바위 틈에 不老草 돋아나고/ 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 불 속에 구어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수하도다 ―「白磁賦」 전문
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문득 이 홍진(紅塵) 세상에서 외롭게 스스로를 닦아가는 선생의 시 중에서 ‘때 묻은 죽지 밑에 푸른 꿈을 안아 두고/ 나날이 욕된 삶을 개천에서 보내건만/ 때때로 고개 비틀고 눈을 감고 느끼도다 // 몸이야 더럽혀도 마음만은 아껴 가져/ 슬픔도 외로움도 달게 받아 겪었거니/…’하는 시조 ‘집오리’를 생각한다.
어느 날 날아간 뒤에야 그것이 커다란 백조였음을 깨닫게 될 세상에 대해서도, 한시를 줄줄 외워 쓰는 재주를 보관할 수만 있다면 유전공학도 꼭 나쁘지만은 않겠구나 싶은 엉뚱한 생각도 해보면서, 아아 그 전에는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만을 빌며 아자방을 나선다. 회혼을 넘긴 단정한 사모님이나, 판사로 재직중인 아드님과 두 따님의 근황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할 틈이 없었음을 용서하라. 그만큼 선생 자신과 선생의 예술이 우리에게 막중하였기 때문이다.]
원로 시조시인 김상옥 씨가 60여년간 해로했던 부인을 잃자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가 엿새 만인 10월 31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노시인 은 부부의 깊고 애틋한 정을 시작품과 함께 세상에 남기고 떠난 것이다.
김 시인은 15년 전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갔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이후 지난 26일 81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김정자 여사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왔다.
큰딸 훈정 씨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던 어머니가 보름 전에 허리를 가볍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의 뼈들이 이미 여러 곳 부러진 상태였다"면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부서진 것도 모르고 그야 말로 '분골쇄신'하며 아버지를 수발하다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말했다.
임종 전 병원에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김 시인은 "자네를 전생에서 본 것 같네. 우리의 이생은 다 끝났나 보네"라며 죽음을 예감한 말을 했다고 큰딸은 전했다. 이 후 '이제부터 나에게 밥을 권하지 마라'며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했다.
노 시인은 결국, 60여년 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던 아내 곁으로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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