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남조(1927-, 대구)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4:00

김남조(1927-, 대구)


김남조 시인은 1927년 9월 26일 대구에서 아버지 김소도 선생과 어머니 최정욱 여사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로 1955년, 조각가인 김세중(金世中. 작고) 선생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 3남이 있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숙명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아래는 김남조 시인 스스로 밝힌 이력서이다.

[ 나의 집안에선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어온 사실과 이일이 나의 심정에 어떤 자국을 새기게 되었는지를 빼 놓고선 글이 안될 것 같다. 그러면서 이 점이 적잖이 괴롭기도 하다.

원래 내 어머니는 4남매를 출산하였으나 장성하기 전에 모두 사망했고 부모도 오래 전에 타계하셨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할아버지 집에 작은할아버지 내외도 함께 사셨는데 네 분이 수년 사이에 모두 별세했으며, 더욱이 작은 할아버지는 느지막이 얻은 외아들을 재해로 잃고 분사라 할 최후를 마침으로써 그의 가문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형님은 유복자를 남기고 젊어서 사망했으며, 그 아들은 자라서 혼인까지 했으나20대에 내외가 죽고 외아들마저 역시 단명했다.

이러저러한 형편들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나 하나만이 생존자인 실정이며, 병풍처럼 에워싸는 죽음들에 대하여는 착잡한 감정이랄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이 내 삶과 나의 문학에도 적잖은 상관을 맺어 오고 있으나 아무튼 여기에선 이에 관하여 더 부언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아 둘은 죽고 둘은 살아남았던 것을 6.25사변 중 무더운 8월에 그 아들이 또한 죽었다.

  그 당시 나도 혈담을 뱉곤 하던 참담한 병중이라 어머니 혼자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어린 아들을 파묻고 오셨는데, 서울이 두 번째 탈환된 1.4후퇴에 모녀가 피난을 갔었다가 몇 해만에 정부의  환도를 따라 다시 돌아온 후 어머니의 치열한 집념은 아들의 묘소를 확인해내는 그 일이었다. 끝내 허사로 돌아가자 급격한 시력 감퇴로 두세 번 안과 수술을 받아야만했고 그 고통 중에 생애를 마치셨다.

어머니를 상기하는 일은 곧 내가 좌절에서 일어나는 그 의미를 이루어 온다. 도저히 감당 못할 중량으로 침몰해 버린 나의 집안, 그 불가사의한 불운들을 돌아다보면 필연코 그 무게를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리게 된다.

내가 손을 놔 버리면 영 그만이라는 비통감으로 없는 힘을 다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결혼 후 가족을 갖게 되었으나 그들조차 이해 못할 비통한 서원이 나의 핏속에 맹렬히 굽이치고 있음을.

어머니는 내 미숙한 글의 첫 번째 독자이셨고 나의 목마른 연정 등속에도 동조자가 되어 주셨다. 앞서도 말한 바 나의 이력서는 감정의 이력서, 혹은 감정이 입은 부상들의 이력서나 다름없다 하겠거니와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열병상태에 나는 빠져 있었으며, 묘한 상황 아래에서만 마음이 불붙어 몇 달 몇 해 건강의 악화마저 겹치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딸자식으로선 가장 구제불능의 문제아였건마는 어머니는 전후의 사정과 내심정의 불가피를 소상히 짐작하시곤 지극한 연민으로 나와 함께 상심과 그 유혈을 나누셨다.

서울대 사범 대학을 다니면서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도 외롭고 가난했으나 이에 더하여 남들이 쉽사리 지병이라고 이름지어 주던 그 폐결핵과 위에서 말한 비극의식 등이 합쳐져 끝내 내 안에서 여지없는 몰락 현상을 빚어냈던 것 같다.

학교는 결석이 많아 성적이 좋지 못했고 예쁘지도 않았으며, 심한 불면증 환자였기까지 해서 전적으로 엉망이었다. 편지를 대신하여 서투른 시를 썼으며 꼭 한 사람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나로선 최선의 표현, 최적의 호소를 미칠 듯이 탐내었었다. 불타고 또 불탔던 그 참담한 인간 화재…….

6.25사변이 일어난 1950년은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였다. 그 잿더미 속에서 몇 낱의 부스러기들로 꾸려진 피난 보따리와 함께 마산까지 흘러가 나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 되었다.

심히 남루한 상심의 상태에서 교단에 섰으며 당시엔 아직 알려진 범위가 좁던 윤동주의 시, 그 밖에도 교과서에 넣어져 있지 않던 여러 아름다운 시들을 학생들에게 떠 옮기고 있었다.

51년 9월, 부산의 남성여고 강당에선 서울대학교 제 5회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날 마침 유가 드문 폭풍우의 날씨인데다 졸업 예정자의 반수도 못 채운 쓸쓸한 졸업식전이었고, 음대의 축가 순서에선 장내가 잠시 울음 바다이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소설가인 정한숙 씨가 나에게 축하 꽃다발을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축 졸업 전광용 군'이란 글씨가 리본에 적혀 있었다. 그날 함께 졸업한 전광용씨를 위해 마련해 왔다가 생사도 몰랐던 나를 보곤 즉시 회수하여 안겨준 것이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꽃다발을 받고 얼이 빠져 서 있는 나를 전광용 씨가 사진까지 찍어 줘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순수하고 귀한 친구들을 어디서 또 만날 수 있겠는가.

나는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은 기독교였다. 부모가 일본을 건너가게 되어 여학교 과정을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다녔는데 입학에서 졸업까지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1944년에 서울에 와서 경성여자 전문학교라는 곳에 입학을 했다. 학교명이 생소하지만 실은 이화전문이 전쟁 말기에 일인들의 정책에 따라 잠시 그런 이름으로 바뀌어졌을 때의 일이었다.

저들은 조선혼의 싹을 자르기 위하여 도처에 삭막한 개혁 바람을 일구었었는데, 그 한 예가 되는 셈이다. 당시의 동급생 중엔 나영균등이 있으며, 내가 들게 된 기숙사의 사감은 후일 총장이 되신 김옥길 선생이었다.

학교 구내에까지 군대가 주둔하여 실탄을 잰 장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학생의 표시가 멀리서도 잘 보이기 위해 우리는 카네이션 크기의 천으로 된 뱃지를 언제나 달고 있어야만 했다. 도장을 찍은 무명 헝겊을 두꺼운 종이에 잘 밀착시킨 다음 가위로 잘라내어 옷핀으로 웃옷에 부착시켰다.

밤 10시는 소등시간인데, 이 규칙이 참기 어려워서 방공용 두건 같은 두꺼운 재료를 창문에 잔뜩 이어 붙이곤 몰래 불을 켜고 책을 읽거나 놀거나 했었는데, 한 번은 갑자기 출입문을 디밀고 사감 선생이 출현했었다. 건물 밖에서 유심히 살핀 결과 규칙을 위반하는 몇 개의 방을 짚어내고 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너무나 부끄러워 슬프기까지 하던 기억이 지금껏 역력하다.

당시 어머니와 동생은 강원도 한 지방에 머물러 있어서 방학에 그곳으로 귀성하였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이듬해 초봄에야 겨우 월남하여 이대에 나갔더니 문과계는 정지용 선생이 관할하고 계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학생은 출교가 너무 지체되어 학적은 일단 말소되었으며 회의에 붙여 방안을 찾아 보겠으니 다음 주 월요일엔가 와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당 날짜에 여자 사범대학에서 입시가 있게 되어 택일의 고민에 붙잡혔다.

시험을 치러 떨어지면 이화 쪽도 놓치게 되겠지만 이대에 가서 복교가 어렵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입시 기회도 못 가지고 일년 간을 허탕칠 판이었다.

결국 나는 입시 쪽을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요행히 합격되어 오늘날의 사범계 출신이 되게 되었다.

그 후에 우연히 들었지만 정지용 선생은 문하에서 여성 시인을 내고 싶으셨고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는 거였는데, 연분이 닿아 그분의 손에서 자랐더라면 나의 문학적 개안도 얼마간 더 나은 형편이 되지나 않았을는지. 서울사대에는 영문학 교수이시던 시인 임학수 선생이 계셨으나 그 앞에 감히 나서 본 적도 없이 6.25때 납북되시고 말았다.]


아래는 김순진 시인의 글과 인터뷰 내용을 가져온 것인데 김남조 시인의 육성만 옮겨 적었다.

[대학 때, 어설픈 글들이 간혹 활자로 찍혀 나올 때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내 글을 기뻐하고 아껴준 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문인으로 설 수 있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둘이서만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그 시절은 이 세상 사람의 절반쯤이나 되는 비중이었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땐 바로 내 자신이 죽은 느낌이었지요.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한 젊은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 신부에게 당부하여 그 신부가 죽는 날까지 날마다 하는 기도 중에 딸을 위해 몇 가지 축원을 보태어 줄 약속을 받으셨지요. 어머니는 1967년 6월 20일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짚을 때 숨을 거두셨지만 그 이후 내 몸 속에서 나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나의의 유년에 대한 기억은 빈 방에서 하루 종일 가위로 종이를 썰고 놀았던 기억 외엔 별로 없습니다. 대구에서 남명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졸업하였습니다. 여고시절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그 시대는 정신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시책으로 지각과 조퇴가 없는 출석률 100%를 경합적으로 시키는 시대였으므로 장기 결석이 불가피한 학생들은 조건부(병이 나으면 즉시 재입학)로 자진퇴학을 요청받아 수개월 퇴학 조치되었으나 그 후 재입학으로 졸업이 인정되었지요. 그러나 단 한 명의 외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학교에서 학적마저 잃은 열일곱 살의 병든 나는 연습장에 어수선한 잡문 수기를 여러 권 쓰면서 참담한 한 시절을 견뎌냈습니다. 그때 나는 식민지의 아이로 소외감과 역경에 억눌린 자아인식의 필연적 폭발 같은 그런 충동으로 무엇인가를 쓰게 된 듯합니다. 그 당시 결핵은 지금의 암과도 같은 난치병으로 ‘초라함과 불쌍함’이 나의 존재의 대명사였고 이와 대치되는 욕구로서 건강과 막연한 명성을 꿈꾸곤 했습니다.


해방되기 바로 한 해 전인 1944년에 한국에 돌아왔고 전시체제에 이화대학(그 당시 학교명 경성여자전문학교)을 다니던 중 해방을 맞이했고, 방학 중 이북의 어머니 친지 집에 가 있다가 삼팔선에 막혀 학적상실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서울사대 국어과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학년에 이르러 6.25전쟁이 나고 재 남침 때 마산으로 피난하여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학생들 중의 몇몇이 후일 각 분야에 인재가 되어 사회에 공헌한 일이 보람을 느낍니다.


1953년 발간된 첫 시집 『목숨』은 전란이 벌겋게 혼돈과 비극을 담아내던 시대에 사람의 울음과 사랑을 나름으로 노래한 것으로서 주변의 지인 몇 사람이 주선한 출판기념회에 당시 문단의 원로분도 몇 분 오셔서 축복을 주셨기에 감격스러웠지요. 그러나 그 이후 나는 수많은 책을 출간해 오면서 단 한 번의 출판기념회도 갖지 않았습니다. 또한 첫 시집 『목숨』의 발문을 이헌구 선생께서 써주셨지만 그때 이후 어느 책에서건 다른 분들을 번거롭게 만드는 서문, 발문, 서평 등의 글을 단 한 줄도 실어본 일이 없고 그러나 출판사 자체에서 기획해서 실은 글들은 많이 있지요.


피난지 마산의 성지여고에 근무할 때 그 학교 학생들의 연극공연이 있었을 때 저는 그 지도를 맡았고 그 사람(남편)은 무대그림과 무대장치를 맡게 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그 후 둘 1955년 조각가 김세중과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 우리 두 부부는 정말 바쁘게 살았지요. 열심히 생활한 나머지 가계의 궁핍은 면했으나 바쁜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외로움이나 의기소침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후회로 남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위한 시간은 절대로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럭저럭 오랜 세월이 지났고 남편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이 완성된 직후 업무의 과로로 돌연 사망하였습니다. 그 때 생명과 일, 생명과 사회활동과는 비례와 평형이 매우 중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 시는 절대 대상이며 하나로 통합되는 동일 존재입니다. 나는 문학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시를 향하는 강렬한 집중을 언제나 지향합니다. 그러기에 이를 따라주지 못할 땐 대인 관계 때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양심까지 뒤흔드는 압박감을 초래하게 됩니다. 나도 그런 점으로 인하여 몇 번이나 낭떠러지에까지 떠밀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고 수많은 시의 독자들이 그러해 주듯이 나 역시 시를 사랑합니다. 시야말로 내 정신이 출산한 적자(嫡子)요, 내 문학의 명분이 이에 달려 있다고 시종 그 인식을 다져왔습니다. 시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지만 또 시를 위하여 많은 것을 주워 담고 보듬어야 합니다. 앞의 말은 시의 집중을 뜻하며 뒤의 말은 심성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는 기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정신입니다. 시는 순박하면서도 진실한 시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직접 시를 쓰지는 않으면서 시를 애독하는 독자 역시 시인입니다. 열광하는 사람이 정말 예술가입니다. 축구장에서 뛸 수 있는 수는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운동장 안에 있는 선수가 드리블을 하거나 골인했을 때 운동장 밖에서 열광하는 관중이 진짜 축구인 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 세대를 걸치는 동안 소수의 독자가 진정한 참으로 그 시인에 영혼을 나누어 가지는 이들이며 따라서 그 수요가 많기를 바라기보다 진정한 독자를 소원하며 노력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문학은 괴로운 자아 인식에서 출발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둔화는 문학의 탄력을 줄인다는 말이 되겠기에 오히려 고통의 배양이 요구됩니다. 문학하는 사람은 고통에 있어서도 건강하고 강렬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통과 등가(等價)인 창조성, 통틀어 ‘살아 있음’을 아픔과 함께 선명하게 감지하고 몰입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으며 그것을 문학 안에서 형상화해야 합니다.

나의 시가 지향하는 바는 특별한 개성이기 전에 위대한 보편성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사랑의 연대(聯隊), 화해의 연대에 끼여 가고 싶습니다. 원천에서 지류까지 시가 원하는 바는 사랑이라 믿으며 이 길을 걸어감을 광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시를 편안하게 읽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쉽게 씁니다. 나의 시는 절망적인 색조에서 끝내지 않고 소망스러운 암시를 필히 입혀놓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절망의 유인이 너무 많으며 우리시대가 과도하게 위험하다고 알기 때문입니다. 나쁜 일과 함께 좋은 일을 보는 시력, 아울러 전부를 보는 눈을 가지며 전인전심 철저히 심정적인 시와 심정적인 삶에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내게는 얼마간의 감수성이 문학적 축복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에서 먹듯이 감수성의 토양에서도 나는 먹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과 내 문학의 힘입니다.


저는 늘 참회라는 어휘를 생각합니다. 어느 책에선가 ‘양심은 엄숙한 취미’라는 글을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숫돌에 칼을 갈아 서슬 푸른 칼날을 세우는 일처럼 사람의 양심도 갈고 다듬어야 하며 그와 같이 시인의 문학혼도 연마해야 합니다.

내 시는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권능의 부스러기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시를 쓸 수 있는 것과 시를 읽을 수 있는 것, 고통과 번민으로 날을 샐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시는 써 갈수록 더 어렵습니다. 30년 전의 시와 비슷하게 오늘 새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자기 표절입니다. 전부 다르게 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2004년에 11월엔 작곡가 이영자교수가 제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을 소개하는 '세월의 거울 앞에서'란 음악회(금호아트홀)를 열었었습니다만  ‘그대 있음에, 가난한 이름에게, 겨울바다, 너를 위하여’ 등 많은 시가 여러 작곡가에 의해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친숙해지고 애창된 노래는 ‘그대 있음에’ 하나로 김순애 곡, 송창식 곡 두 가지 모두 비교적 보편화되었습니다.


예전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건강과 총기가 다소 남아있는, 내 생애 끝 무렵 몇 년쯤은 아직 못다 본 아름다운 것 무량한 것, 위대한 자연과 탁월한 이들의 여러 명작을 바라보고 읽으며 감동할 수 있기 바란다고요. 그런데 아직은 좀 더 글을 써야 할 때인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