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춘수(1922-2004, 경남 통영)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4:02

김춘수(1922-2004, 경남 통영)

 

 아래의 글은 김춘수 시인이 자신의 삶을 회고한 내용을 발췌·요약한 것이다.

 [요즘도 나는 화창한 대낮 길을 가다가 문득 어디선가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환청이다. 갈매기의 울음은 고양이의 울음을 닮았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고향 바다는 너무 멀리 있다. 대구에서 20년이나 살면서 서울에서 10년 넘어 살면서 나는 자주자주 바다를 꿈에서만 보곤 했다. 바다는 나의 생리의 한 부분처럼 되었다. 특히 통영 앞바다-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댓살 났을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이른바 미션 계통의 유치원에 다녔다. 그 유치원은 여황산이라고 해발 200미터가 될까 말까한 산의 산발치를 깎아서 터를 닦고 목조 단층의 교실과 한 100평 남짓한 운동장을 마련한 그런 곳이다.

  산발치의 그 유치원에서는 통영시가가 한눈에 잘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일과를 마치면 으레 삼삼오오 모여서는 시가와 바다를 한동안 내려다보며 뭐라고 저마다 재잘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는 것인즉 그 시각(열두시쯤 되는)에 부산에서 여수로 가는 철선이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시가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 시각쯤 되면 철선이 수평선을 한참 넘어서서 저만치 우리의 몸매만큼한 크기로 항구를 바라고 들어오고 있다. 얼마 뒤에는 선창에 배가 닿고 사람들이 내리고 내린 숫자만큼 사람들이 탄다. 사람들의 그 오르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 그리도 재미있고 즐거웠던지?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들고 있는 짐들도 가지각색이다. 어깨에 둘러멘 짐짝도 있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까?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다가 뭐라고 저마다 재잘거린다.

  지금의 국민학교를 그때는 보통학교라고 했다. 이수 기간은 6년이나 간이학교라고 해서 면소재지에는 4년제 보통학교가 있었다. 거기를 마치고 더 공부하고 싶으면 읍내의 큰 학교로 편입을 한다. 면에서 읍내의 큰 학교로 편입돼 오는 아이들은 거의가 그 고을에서는 밥술이나 뜨는 집 자식들이다.

  그해 가을의 대운동회때의 일이다. 나는 반장이라고 뽑혀서 공중에 커다랗게 매달아 놓은 흑판에 스코어를 적는 그 기록계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몹시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보통학교의 가을에 하는 대운동회라는 것이 어느 고장 할 것 없이 그때는 그 고장 전체의 축제가 된다. 내 집에서도 조모님을 선두로 어머님, 고모님이 따라나섰다. 지게에 음식을 잔뜩 담아 싣고 머슴이 운동장까지 날라다 준다. 나는 만석꾼네집의 손자다. 내집  여자분들이 번쩍거리는 비단옷을 차려입고 운동장 한쪽에 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기만 했다. 내 이런 성미를 내 선친께서는 내가 어딘가 못나서 그렇다고 하셨다.

  하여간에 나는 조모님의 훤칠하니 돋보이는 몸매까지가 왠지 누군가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나는 나 혼자 뭐가 그리도 부끄러웠던지 점심시간이 되어 조모님이 일부러 나를 데리러 오셨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자리를 뜨지 않고 그날은 점심까지 굶었다. 얼마나 시장했을까? 조모님은 달래다 꾸짖다 하시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돌아서면서 혀를 쯧쯧 차시었다.

 부모님의 기대에 걸맞게 나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고교)에 입학했다. 열 네 살 나던 해의 초봄이었다. 학교가 시작되어 나는 그 가회동 집에 하숙하게 되었다. 주인은 중년의 과부다. 방이 빈 데가 없어 방이 빌 때까지 나는 그 주인 아주머니와 한 방을 쓰게 됐다.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지만 선친께서는 무관하게 대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는 좀처럼 대해지지가 않았다. 몇 달을 거기서 지내는 동안 나는 점점 경성이란 곳과 학교가 거북해지만 했다. 그 집은 가회동 꼭대기에 있었다. 전망이 썩 좋았다. 담장가에 서서 굽어보면 경성이 한눈에 훤히 다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담장가에 붙어 서서 나는 하염없이 꽃밭 같은 경성시가의 불빛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는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곤 했다. 왠지 허전하고 아쉽기만 하고 막막해지기도 했다.

  전문학교에 다니던 외사촌형이 내 하숙에 들러 내 처지를 보고 딱하게 여겼던지 자기 친구집에 부탁하여 나를 그 집에 하숙하게 해 주었다. 그 집에서는 내 방이 따로 있어 자유롭고 편하기는 했으나 학교와는 역시 지척의 거리였다. 그런데도 나는 자주 지각을 했다. 가기 싫은 학교를 억지로 가게 되니 발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아예 학교를 까먹는 일도 있었다.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별로 사귀고 싶은 친구가 없었다. 한동안 나는 외토리였고,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일도 없었다. 자존심만 자꾸 부풀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실인즉 나는 내 사투리에 스스로 질려 있었고, 서울말의 그 억양에 익숙해지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학기가 가고, 한 해가 가는 동안 학교는 또 다른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운동도 하고 적당히 사보타아지도 하고, 책가방을 든 채 영화관에 가서 「무도회의 수첩」과 같은 영화에 감동도 하고, 완전한 서울말의 억양으로 건방진 소리도 때로는 마구 지껄이고 있었다.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는 일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남들이 그러는 것을 볼 적에는 더욱 시시해 보이기도 하고, 그럴 대는 교문을 빠져나와 도서관으로 직행하는 일도 있었다. 거기서도 멍하니 앉아 있기가 일쑤다. 시립도서관에서는 그때 맛있는 빵을 팔고 있었다. 그것이 먹고 싶어서 거기를 들르는 일도 있었다. 따끈한 차물과 쟁반만한 호떡을 먹는 그 재미로 학교 갈 시간을 호떡집에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한 번은 겨울날 아침 등교길에 학교는 가지 않고 딴 길로 빠져 산에 올라가서는 눈위에 망토를 깔고 웃저고리를 벗어 머리까지 둘러쓴 채 한동안 나자빠져 있었다. 약수를 먹고 내려오던 아침 등산객들이 이 꼴을 보고 달려와서는 붙들어 일으킬 때까지 나는 그러고 있었다. 뭣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때 공부하는 곳이 학교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이 있을까?

  나는 책상머리에 앉기만 하면 머리가 띵해지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사춘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했던 듯하다. 생리문제를 잘 조절하지 못하고 우울하기만 했다.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저지른 일은 없었으나 어딘지 무기력하고 무엇에도 흥미를 못 느끼고 학교를 자주 까먹곤 했다.

  열 네 살에서부터 열 여덟 살까지 나에게는 학교가 없었다. 나는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5학년 2학기 말, 그러니까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자퇴서를 내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담임선생과 트러블이 있기는 했으나 학교측에서 나에게 어떤 벌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학교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지금도 그 까닭을 모른다. 인생에 무슨 까닭이 꼭 있어야만 하는가? 사춘기의 사춘기병이랄까,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일종의 질환이다. 졸업 증서라는 한 장의 종이가 엄연한 현실이듯이 학교가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내가 자퇴서를 냈다고 하니까 선친께선 눈만 한 번 크게 뜨시곤 아무말도 안 하셨다. 내가 동경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그러라고 하셨다.

  나는 동경을 건너가서 영수학관(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입시준비학원)에 건성으로 다니는 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수학관이 있는 간다라고 하는 대학가를 어슬렁거리다가 거기 즐비한 헌책방 한 군데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서자 나는 압도되고 말았다. 헌책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와 내 어깨까지 닿는 가로 세워 놓은 책들은 처음 보고 겪는 충격이었다. 나는 또 주눅이 들어 오래 있지를 못하고 어서 그곳을 벗어나야 하겠다고 마음이 자꾸 불안해졌다. 그냥 나오기가 뭣해서 한쪽 귀퉁이에 꽂힌 얄팍한 책 한 권을 얼른 뽑아서는 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숙에 가서 펴 보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아름다운 울림을 가진 시인의 시집이었다. 일본어 번역판이다. 해설을 보니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독일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편다고 편 페이지에 실린 짧은 시를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시라는 것이 정말 있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시를 읽고 그처럼 감동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나는 얼마 뒤에 그 시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운명은 나를 엉뚱한 길로 데리고 갔다. 나는 뜻밖에도 예술대학의 창작과에 적을 두게 되었다. 중학때처럼 학교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럭저럭 세월만 그런대로 보내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돌발사가 불거지고 말았다. 어떤 사건에 연류되어 처음에는 헌병대에 한 달쯤 유치되었다가 경찰서 고등계로 이송이 되었다. 거기서 반 년쯤 시달리다가 석방되어 부산 수상서까지 팔에 쇠고랑이 차인 채로 송환되어 왔다. 나에게는 불령선인이란 딱지가 붙게 되었다. 1943년의 일이다.

  나는 이미 학교는 퇴학이 되어 있었다. 헌병대에서 학교에 연락하여 그런 조처가 이미 취해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학도병으로 붙들려 가는 봉변은 면하게 되었다. 졸업을 이때도 몇 달만 남겨 두고 있었다. 조모님은 중학교때에도 그러셨는데 이번에도 학마(學魔)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그때는 식량이 배급제일 때다. 식량을 타려면 배급통장에 이름이 얹혀야 한다. 나는 일부러 배급통장에서 이름을 빼고 두더지처럼 여기저기를 숨어다녔다. 45년 8월 15일 그날까지 일 년 남짓한 동안은 나에게는 숨막히는 나날이었다.

  나의 제2의 습작기는 8·15해방과 함께 왔다. 45년 가을에 나는 고향인 통영으로 건너갔다. 만주에서 귀향한 시인 유치환 씨를 비롯해서 음악도(작곡) 윤이상, 정윤주, 화가 전혁림, 극작가 박재성, 김용기, 시인 김상옥 제씨와 '통영문화협회'라는 문화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의 발표욕은 자꾸 부풀기만 하는데. 시골(통영)에서 발표기관은 없고 해서 답답하기만 했다. 곁에 청마가 계셨지만. 시랍시고 쓴 것을 가지고 가서 보이면 여긴 철자가 잘못 됐군 하는 정도로 반응을 보일 뿐이다. 나는 나에게 실망을 거듭했다.  그때는 서정주와 청록파 시인들의 시에 압도되고 있을 때다. 그들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유형 무형으로 내 습작품에는 스며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나는 제2의 습작기를 그들의 영향 하에서 출발했다. 일종의 아류시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런 류의 습작들을 모아서 염치도 없이 자비로 출판한 것이 나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다. 500부 한정판이다. 그것이 48년 여름의 일이다. 같은 해에 청마가 《울릉도》라는 시집을 내고 있다. 그해 연말인가 그 이듬해의 정월인가 청마와 나는 서울행을 함께 하게 됐다. 서울의 〈청년문학가협회〉가, 중에서도 김동리 씨가 주동이 되어 출판기념회를 성대히 열어주었다. 문단의 대선배들이 자리를 메울 정도로 참석해 주었다. 생각건대 청마를 위한 출판기념회인데 젊은 신진이 같은 시기에 시집(그것도 처녀시집)을 내고 함께 상경했으니 제쳐버리면 서운할 것이라는 동리 씨 주변의 배려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덤으로 끼이게 된 셈이다. 하여간에 기라성 같은 선배시인들을 대하고는 나는 시종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이한직이 공초선생을 모시고 청마와 나와 또 다른 몇이와 함께 요정 국일관에서 밤새도록 진탕 술을 마시게 해 준 것 또한 그때는 인상 깊었고,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49년 연말에 나는 제2시집을 상재할 생각으로 묶어둔 원고뭉치를 들고 상경했다. 미당의 서문을 얻고 싶어서였다. 전차에서 내려 명동입구를 들어서는데 저만치 비틀거리며 가고 있는 키 작은 중년이 눈에 띈다. 내 예감이 맞았다. 가서 보니 미당이다. 그때 소설을 습작하고 있던 손소희 여사가 경영한 다방('마돈나'라고 했던가?)에서 미당과 나는 마주 앉았다. 그때가 땅거미가 막 질까 말까 할 때인데 미당은 벌써 술이 어지간히 몸에 밴 모양이었다. 내가 용건을 말하자 두고 가면 일후에 서문을 써보내겠다는 대꾸만 하고 고개가 아래로 자꾸 떨어진다. 나는 물러설 수밖에는 없었다. 얼마 뒤에 원고뭉치와 함께 짧은 서문이 우송돼 왔다. 거기(서문)에는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에서 별로 진전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산에서 (그때 나는 마산중학으로 직장을 옮기고 있었다.)초라한 체제의 제2시집 《늪》을 내고야 말았다. 내가 봐도 너무 성급한 거리였다. 50년의 일이었다.

  6·25가 터진 그해 나는 우리 나이로 스물 아홉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이 그때 일본을 거쳐 상륙해 와서 젊은층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나도 거기 호응해 간 청년 중의 한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에 특히 관심을 쏟게 되었고, 학생 때에 읽은 쉐스토프를 다시 또 읽게 되었다. 그러자 새삼스럽게도 독일(정확하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세계가 연상으로 떠올랐다. 학생때 읽은 릴케의 영향이 이런 모양으로 불쑥 나타나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아류의 티를 벗고 내 나름의 길이 열리는 듯 했다. 그것이 릴케류의 관념시다. 꽃을 소재로 해서 상징주의적 빛깔이 짙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시들이 연작으로 10편 정도 쓰여졌다. 이때로부터 나는 선배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습작기를 벗어났다는 시원한 감회를 가지게 되었다. 내 나이 이미 30살을 넘어서고 있었다. 몹시 늦은 각성이다. 이 무렵에 비로소 나는 애착이 가지는 시를 생산할 수 있었다. 「꽃을 위한 서시」를 탈고했을 때 마침 마산에 들른 평계 이정호에게 보였더니 무릎을 탁 쳐주었다. 비로소 자네의 시가 나왔다는 치하의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끝의 한 행은 너무도 릴케의 수사를 닮고 있어 불안하다는 첨언(添言)을 잊지 않았다. 시인이 되는 것이 참 어렵기도 하구나, 하는 것이 그때의 내 감회였다.

  일모 한모형을 처음 만난 것은 50년대의 중반쯤으로 그의 첫 인상은 기이했다. 키는 땅딸막하고 머리는 가분수로 크고 음성은 유별나게 굵고 거동이 아주 완만하여 선 키와 앉은 키가 별로 다르지 않다. 서울에서 강연회가 있어 올라갔다가 만났다.

  나는 그날 강연회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주량이 약한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며 그들이 권하는 바람에 거절을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 마신 술이 자리를 뜰 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 끝까지 배있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간신히 강연장에 발을 들여 놓게 되자 나는 정신이 다 몽롱해졌다. 나를 나이가 든 선배라고 대접해서 그랬는지 제일 먼저 등단하게 했다 호명되어 등단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랫도리가 떨린다. 뭐라고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두어마디 하고는 말문이 칵 막히고 말았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보기에 딱했으리라. 누가 와서 나를 붙들고 데려갔다. 그런 모양으로 그 날의 내 강연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나 그 뿐인가. 그 다음날도 나는 스타일을 구기고 말았다. 한무숙여사 댁에서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사회자가 나더러 아주 난감한 질문을 던지며 한 마디 먼저 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혀를 찔린 사람처럼 되어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또 한번 말문이 막힌 것이다. 좌중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런 공기를 사회를 본 일모형이 다독거렸다고 생각된다. 강연회와 좌담회에서 연출한 내 실책을 두고 일모형은 그 뒤 한참동안 "김형은 눌변이야"라고 했다. 60년대 중반쯤이라고 기억되는데 내가 적을 두고 있었던 경북대학에서 학회가 있어 논문발표에 대한 강평을,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일모형은 조금은 나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듯 했다. 눌변이란 말을 그 뒤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그때 지어 보였다.

 나는 지금도 그런 편이기는 하지만, 20대가 다 가도록 현실감각이란 것이 몸에 배지 않았었다. 졸업을 서너 달 앞에 두고 별일도 아닌 일에 학교(중학)를 자퇴한 그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학교중퇴가 내 장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는 감각이 전연 없었다. 내가 80년초에 여당의 창당준비위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오해와 억측과 악담이 나에게 그처럼이나 쏟아지고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었다. 어떤 이는 내 면전에서 시를 포기했느냐고 힐난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학교수를 하면서 시를 쓸 수가 있다면 여당의 창당준비위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시를 못쓸 까닭이 어디 있는가? 나는 그냥 웃고 말았는데, 문단과 나의 독자들은 나를 우습게 보고 도덕적으로 비판하기도 한 모양이다. 내가 국회의원을 그만두었을 때 심지어 얼마나 보상을 받았느냐고 정색하는 교우도 있었다. 기가 찰 일이다. 그때사 세상의 어떤 통념에 내가 밥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 것은 당시 상황이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게끔 강제한 면이 있다. ]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등의 시집으로 한국문학사에 관념시, 무의미시의 좁고도 새로운 물꼬를 튼 김춘수 시인. 시인은 90년대에 들어서도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의자와 계단』 등 빼어난 시집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를 무색케 하고 있다. 요즘도 한 달에 평균 2-3편의 정도의 시를 쓰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o 시작(詩作)하시는 데 영향을 미쳤던 시인으로 국내에서는 정지용 시인, 국외에서는 릴케를 거론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시인의 어떤 점에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정지용 시인에게서는 말을 다루는 방법, 즉 말을 어떻게 절제하느냐, 어떻게 짧은 시행 안에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겠는가 하는 함축의 요령을 배웠습니다. 릴케에게서는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에서 한발짝 떨어져야 해요. 릴케는 시를 쓰기 위해 가족까지도 버렸습니다. 저는 릴케만큼 그 말에 충실하지는 못했습니다만.

 o 선생님과 김수영, 서정주 시인을 습관적으로 연관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김수영 시인과는 60년대에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고, 미당 선생과는 그 문학적 업적이나 우리 문단에서는 유례가 드문 오랜 시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두 시인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김수영은 제 평생에 유일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시인입니다. 그를 굉장히 의식하면서 시를 썼었죠. 만약 그가 없었다면 제가 김수영과 같은 시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김수영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다 보니 지금의 시세계에 다다른 면이 없지 않아요. 그와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여동생과는 친분이 좀 있었습니다. 그분 말에 따르면 김수영도 저를 많이 의식했었다고 하더군요. 미당은 저에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 분입니다. 말 그대로 천재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죠.

 o 선생님이 출생하신 통영에서는 유치환, 박경리 등 문인과 윤이상 같은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됐습니다. 고향 얘기를 좀 해주시죠. 보통의 서정시인들과는 달리 선생님의 시는 고향에 대한 기억에 크게 의존하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 비슷한 시기에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됐죠. 통영은 경치가 빼어나고 일제시대에는 수산물의 집산지였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았고 일찍이 개화한 곳이었습니다. 그때 뛰어난 예술가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된 것도 그런 영향이었을 겁니다. 저 또한 다른 시인들처럼 고향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시에 바다 이미지가 많은 것도 고향 탓이죠. 고향 이야기가 표면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지만요.

 o 그토록 오랜 세월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비결이 있으십니까?

 - 특별한 비결은 없고… 저는 시 쓰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잡기도 할 줄 모르고요. 그러다 보니 자꾸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쓰기가 제 유일한 업(業)이자 취미이며 소일거리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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