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해송(1905-1966, 황해도 개성)
마해송은 1923년 순 우리말로 된 동화 <바위나라 아기별>을 쓰는 등 총 일곱 권의 동화집과 동요, 수필, 소설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고 1958 국내 최초 어린이 헌장비 건립을 주도한 사람이다.
1951년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또다시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1년 1월의 혹한 속에 대부분의 문인들이 일차로 집결했던 곳은 대구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지난 경험을 살려 다시 종군문인단을 결성하게 된다. 대개 창공구락부라고 불렀던 이 단체에는 마해송, 조지훈을 비롯해서 최인구,박훈산,박두진,박목월,유주현,방기환,이상로,곽하신,전숙희,최정희,이한직,김윤성,김동리,황순원 등 16명의 단원으로 결성됐다.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은 조지훈이었다. 마해송은 대령급, 그밖의 문인들은 대위 이상의 대우로 봉급을 받았고, 쌀 배급도 받았다.
처음 그들은 군가 작사, 강연회, 대내외적인 반공사상 보급, 일선 시찰, 문화인 시국 강연회, 종군 보고 강연회, 포스터·전단·표어 작성 등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시간이 자나자 그것도 늘 되풀이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자연 다방으로, 술집으로 모이게 되었다. 다방은 아담이 단골이었고, 술집으로는 석류나무집, 말대가리집, 감나무집 등이 집결지가 되었다. 말대가리집은 여고 과정을 마친 단발머리 아가씨가 주인이어서 페미니스트적인 문인들의 발길이 자주 그곳으로 향했다.
그 말대가리집, 석류나무집엔 마해송의 격조 높은 풍류와 조지훈의 호탕한 기개가 어울려 언제나 화기애애했으며 문학 얘기, 음담패설, 음주철학 등이 쏟아져 나왔다.
외상이 쌓이고 쌓이면 문인들을 좋아하는 장성이라든지 실업가, 지방유지들이 독지가가 되어 갚아주었고, 그러면 문인들은 거보란 듯 우리가 술값 떼먹을 사람이냐는 듯 으스대며 다시 외상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환도한 뒤에도 그들은 매주 수요일, 명동의 '문예살롱'에서 모여 퇴계로에 있는 '포엠'이란 술집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그들은 술잔을 들고 가난하되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운 목소리로 석류나무집, 말대가리집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임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마해송이 주도했다. 그의 인품이 그 분위기를 감싸 이끌어간 것이다.
마해송은 술은 소주만 마셨고 담배는 백양만 피웠다. 특히 흑갈색 찻잔에 따라 마시는 깡소주를 좋아했다. 됫박으로 쌀을 사다 먹는 주제에 무슨 양주 호강이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1966년 11월 5일. 그는 시인인 아들 마종기의 시가 <여원>이라는 잡지에 실렸다고 해서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어오다가 뇌일혈로 쓰러졌다. 미리 써놓은 유서 내용은 이렇다.
"공교롭게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뭇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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