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1915.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했다.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후 2학년때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30년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되었다.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 당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에서 2년간(1935-1936) 수학했다.
1933년 [동아일보]에 시<그 어머니의 부탁>을, [시건설(詩建設)] 7호(1935.10)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동인[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재했다. 1938년 화투패를 떼 보고 선을 본 방옥숙 여사와 결혼하고 첫 시집 '화사'를 남만서고에서 출간, 그뒤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황막한 강산을 떠돌았다. 서울의 여기저기에 기류하다가 만주 일대를 방랑하기도 했다. 한동안 간도에서 양곡주식회사 경리사원으로 있었고 용정에도 가 있었다. 일제 말기를 고향과 서울에서 전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시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우익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1946)했다.
동아대학 교수, <동아일보>사회부장, 문화부장 등에 취임한 후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약 1년간 역임하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시부위원장에 피임되었다. 시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하며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조지훈, 이한직 등과 한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대전, 대구 등지로 피난하였다. 전쟁과 함께 그는 극심한 정신분열증세를 일으켜 전시임시문인단체인 문총구국대 문우들의 보살핌으로 대구의 병원과 부산의 한거에서 요양하다가 9.28 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 무렵의 일을 최하림을 이렇게 전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식민지 현실에서 서울에 남은 문인들은 대부분 굴종의 길로 갔다. 이광수, 주요한, 김동환, 김팔봉 등이 그 선두주자였고 최재서, 김종한 등이 후미에서 깃발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서정주, 오장환도 그들의 꽁무니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예찬하고 천황을 노래했다. 한국의 청년들에게 학도병과 정신대에 나가라고 말과 글로 역설했다. 심지어 우리 젊은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적함에 몸을 던지는 '가미가제'를 신성극으로 그리기도 했다.
1944년 초의 일이었다. 한떼의 문인들이 일본군의 대기동연습을 참관하러 김제로 내려왔다. 대기동연습이 끝나던 날 밤, 그들은 요정으로 가 정종을 마셨다. 어떻게 정신없이 마셔댔던지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옷을 벗을 힘조차 없었다. 서정주는 '단꼬즈봉' 바람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아 최재서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더니 실연한 사나이처럼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서정주를 껴안고 대성통곡했다. 왜 그가 그때 대성통곡했는지, 술 탓이었는지, 자기부정의 수치심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통곡이 술과 수치심과 식민지 청년의 절망이 버무려져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터져나온 것이었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1.4 후퇴와 함께 가족과 더불어 피난열차, 마차 따위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으며 후배들의 알선으로 생활 터전이 마련되었다. 전주시대는 자살미수사건도 생긴 반면 동양사상과의 만남에 의해서 1936년 초기에 강렬하게 보인 보들레에르풍의 마성이 승화되었다. 그의 전주시대 그리고 광주시대에 이르러 이른바 대가시 <상리과원> <무등을 보며> 등 명작을 산출했는데, 이런 서정주 문학의 예술적인 승리는 그의 정신분열증세와 함께 진행되었다. 전주의 전시연합대학 강사, 전주고교 교사, 조선대학 부교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환도와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술원 회원,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 동국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1960년 시집<신라초>를 출간했다. 한국 문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다섯 차례나 추천되는 영예도 안았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문예 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 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이다.
반면에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이 서정주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내리게 했다.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 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 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했다.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랬다.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 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래의 글은 평론가 김명인의 글이다.
[서정주의 제자였던 시인 고은이 근자에 ‘미당담론’이라는 제목으로 비평적 에세이 한 편을 썼고, 그것 때문에 저널리즘이 자못 소연한 듯하다. 고은은 서정주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화상’을 문제 삼아 서정주의 욕된 일생의 원천을 밝은 대낮에 꺼내 놓았다.
고은은 이 글에서 서정주와 얽힌 개인사의 편린들을 먼저 담담히 풀어놓은 후 서정주를 두고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세상사를 개괄적으로 깨달은 나머지 세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자책도 필요 없게 된다”, “체질적인 자기합리화”, “수줍음 대신 본능적 공포”, “시대에 대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운 굴복”, “역사의식으로서의 자아가 가능하지 않았다”, “시대의 정면에서 약한 존재이고, 시대의 측면에 기탁함으로써 존재의 회로를 찾아내는 곡신불사의 운명” 등의 비수 같은 수사들을 ‘차분히’ 펼쳐갔다.
그의 이런 평가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나는 이 글이 적어도 사십구일은 묵혀서 내놓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착 가라앉은 글이며, 그 안에는 죽은 '스승’에 대한 적지 않은 예(禮)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처럼 ‘마음에 어른이 없는’ 세대의 눈으로는 차라리 성에 차지 않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글에 대한 몇 편의 반론도 읽었다. 이 반론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서정주 신화’가 생각보다 매우 심하다는 것이었다. 한 시인은 서정주의 시 세계를 일컬어 “눈부신 모국어의 빛살로 시의 산맥을 이룬”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친일과 이후의 권력지향을 두고 충분히 값을 치른 것인 만큼 새삼스레 “스승의 산소에 칼을 꽂는” 고은의 글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라 했다. 한 평론가는 한술 더 떠서 고은의 글을 “우리 문학사의 커다란 유산인 미당의 시를 쓰레기통에 넣는”, “마땅히 제지되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나는 고은의 서정주의 삶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자화상’에 대한 해석에는 약간의 이의가 있고, 정말 ‘졸작’ 몇 편으로 그런 온당한 평가의 매개를 삼은 것에는 아쉬움이 있다.
서정주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야말로 그의 가련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인 삶을 비추는 적나라하게 맑은 거울들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의 일생을 통한 권력지향과 정치적 노예성을 살짝 도포(塗布)하는 언어가 그토록 공교롭다는 것에 아이러니컬한 경이감을 느낄 뿐이다.
나는 “미당의 삶에서 정치적 삶의 비중은 매우 작다”고 한 비평가에게, “그의 삶과 시 모두는 차라리 과잉 정치적이었다”는 말을 돌려주고자 한다. 친일시나 월남파병 예찬시, 전두환 찬양시만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영남정권 시대에 ‘질마재 신화'를 쓰기 전에 ‘신라초’를 먼저 써야 했던 호남 시인의 슬픈 정치감각은 곧 그대로 그의 삶이자 시가 되는 것이다.
그게 마름의 삶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게 노예의 시가 아니고 무엇일까. 노예의 시가 때로는 더 아름다운 법이긴 하지만 서정주는 ‘비단옷을 입은 노예’였다. 나는 사실 그 자태에 홀리거나 홀린 척하거나 홀리게 하는 후인들이 더 가련하기도 하고 더 무섭기도 하다. 서정주 신화의 그늘에는 그의 수많은 제자들의 유아적이고 봉건적인 맹종도 깃들어 있지만, 터무니없는 정치적 저능아 서정주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신화화함으로써 한국현대사를 일관해온 자신들의 무지몽매한 노예성에 함께 면죄부를 받으려는 일종의 집단무의식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모 잡지사 기자가 말년의 서정주에게 약주와 담배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애(아들)야 물론 늘 끊으라고 성화지. 그럼 난 「들고만 있는 거야, 손이 허전해서」 라고 변명하네만, 독한 술은 이제 못 먹어. 하루에 맥주 대여섯 캔이 고작이지. 그 정도면 심장에 습기를 주는 효과도 있지 않겠나? 꽃밭에 물을 주듯이 말일세. 담배는 피네스(FINESSE)라고 미국 담배를 핀다네. 세계에서 니코틴이 제일 적은 담배래. 그 나마도 니코틴을 줄이려고 한두 모금 빨고는 새 담배로 바꿔 물고 있지. 꽁초일수록 니코틴이 많아지거든』
부인 방옥숙(方玉淑)씨 별세(2000.10)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던 서정주 시인은 2000.12.24. 13시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85세)했다. 재미 변호사와 재미 심장 전문의인 승해(升海)와 윤(潤) 두 아들을 두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히었다. 정부는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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