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1930-1969, 충남 부여)
1930년 8월 18일, 신동엽은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독자였던 부친 신연순에게는 전처 소생으로 일남 일녀가 있었으나 그중 아들이 겨우 돌을 넘기고 사망해 버린 까닭에 실제로 신동엽은 이대독자로 태어난 셈이다. 더구나, 신동엽의 모친은 신동엽 밑으로 아이를 일곱 낳았지만 모두 딸이었고 그 중 위로 셋은 일찍 죽은 까닭에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 애정은 매우 컸다.
그는 유년 시절에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한다. 1937년 부여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뛰어난 머리로 국민학교 6년간 계속 1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민학교 6학년이 되던 해인 1942년 4월 부여 국민학교 대표로 '내지 성지참배(內地聖地參拜)'를 다녀오기도 한다.
신동엽의 유년 시절에 중요하게 작용한 인물은 1928년생인 이복 누님 신동희이다. 큰 누이동생 명숙이 나던 1943년까지 신동엽은 오직 두 살 위인 신동희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신동엽의 이복 누님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 그 정은, 연민의 색채가 짙다. 태어나자마자 곧 친모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그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니만큼, 고통의 크기는 적잖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이복 누님이 신동엽에게는 애처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신동엽은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학비가 들지 않는 관비학교 전주사범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다. 전주사범에서는 전주에 사는 학생들만을 제외하고는 지방학생들 모두에게 기숙사 생활을 시켰다. 관립학교로 학비가 들지 않는 대신, 국민학교 교사를 '주조(鑄造)'해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틀에 의한 획일화가 강요되었고 그러니만큼 숱한 제약이 주어졌다.
게다가 기숙사에서 지급되는 식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의 전주사범기숙사 생활을 회상하고 있는 하근찬의 단편「32매의 엽서」(月刊中央 1972. 6)에서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보면 기숙사의 식사는 형편이 없었다. 알루미늄 식기에 옥수수밥이 움푹 꺼져들어가 있고, 국도 그저 된장에 시래기를 넣고 소금을 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다꾸앙이 몇 쪼가리 놓여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신동엽의 아버지는 학교측에 사식원을 제출하여 보았으나 '국난시라 인고단련을 해야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허가해주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그의 아버지는 한 달에도 서너 차례씩 떡 같은 음식물을 만들어 가지고 부여에서 강경을 거쳐 전주에 이르는 먼 길을 자전거로 왕래했다.
신동엽은 1948년 전주사범을 퇴학당한다. 당시 신동엽의 이념적·정치적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근찬에 의하면 신동엽은 학생사회의 좌·우 대립속에서 적잖이 린치를 당했다. '그 조그마한 체구로' 신동엽은 때로는 우익 학생들에게 끌려가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좌익 학생들에게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범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게는 되었지만 국민학교 교사 자격은 인정되어, 근처의 어느 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부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주사범때 대립되었던 자가 그 국민학교에 와있어서 부임 사흘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949년 신동엽은 아버지의 밭 600평을 팔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 후 6.25가 일어나고 그는 제2국민병으로 징집된다. 정부는 방위군 처우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36세 이상의 장정은 귀향조치를 취하고 신동엽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낙동강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게를 잡아 날로 먹기도 했는데 이때 간염된 폐디스토마로 인해 1958년에는 각혈을 하여 모처럼 얻은 직장까지 사임하고 돌도 안된 맏딸과 신혼초인 아내와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는 그의 사인이 된 간암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짐작된다.)
1953년 초겨울 어느날 신동엽은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당시 이화여고 3학년의 단발머리 소녀였던 인병선은 남편을 사별하고서 1년 반 뒤인 1970년 겨울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여성동아》에 회상기를 쓴다. 그녀는 첫 만남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온통 신동엽에게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인병선은 신동엽을 굉장한 신비주의자의 면이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교육평론사를 사직하고 교직을 물색하는 중 마땅한 자리가 쉽게 마련되지 않자 신동엽은 그 조그마한 체구로 한바탕 해프닝을 연출했다. 소개는커녕 사전 통고도 없이 다짜고짜 명성여고 교장실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심태진 교장에게 한 권의 스크랩북을 내밀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나와 버렸다. 그 스크랩북은, 그 동안 발표한 자신의 시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저는 이런저런 사람인데, 읽어보고 나서 국어 교사로 씀직하면 한 번 써보시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신동엽은 명성여고 야간부 국어교사로 특채된다. 명성여고는 그 후 타계하기까지 근 9년 동안의 직장이 된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다.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퇴원을 지시했다. 회복 불능이었던 것이다. 4월 7일,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신동엽은 숨을 거두었다. 부여에서 상경한 노모에게 "나 죽은 후라도, 저 사람이 무어라 해도 이쪽 귀로 듣고 저쪽 귀로 흘리세요"라고 당부한 것이 그가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문인 일화(ㅂ-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창섭(1922-2010, 평양) (0) | 2010.08.30 |
---|---|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0) | 2010.08.30 |
신채호(申寀浩, 1880-1936, 충남 대덕) (0) | 2010.08.30 |
신경림(1935-, 충북 충주) (0) | 2010.08.30 |
선우 휘(鮮于 煇, 1922-1986. 평북 정주 ) (0) | 2010.08.30 |